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편 56:3)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는 대부분의 부정적 감정인 짜증, 분노, 걱정, 불안, 심지어 우울함까지, 그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 보면 결국 ‘두려움’이라는 한 가지 뿌리에서 비롯됩니다. 연구에 따르면, 두려움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 뇌의 편도체에서 비롯되는 생존 반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려움을 영적인 차원에서 다르게 해석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 즉 죄로 인해 분리된 인간의 내면은 근본적으로 불안하고, 그 불안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두려움으로 나타납니다.
아담이 타락 후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을 기억합니까?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두려움은 죄 이후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 새겨진 상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짜증으로, 또 어떤 때는 자기비난으로 그 두려움을 감춥니다. 결국 분노는 두려움의 또 다른 얼굴이며, 짜증은 불안의 외피입니다.
두려움이 강할수록 사랑은 약해집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이 구절은 단순히 감정적 위로의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뇌의 구조적 반응조차 이 말씀과 일치합니다. 편도체가 과도하게 활성화될 때, 즉 ‘위기 상황’이라고 판단할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뇌는 생존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시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 용서, 감사, 존중과 같은 긍정적 감정은 전전두 피질을 활성화시키며, 그때 우리는 진정한 ‘사람다움’을 회복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적으로 말해, 믿음의 삶이란 두려움 대신 사랑이 작동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의 뇌도 안정됩니다. 기도와 묵상, 찬양 속에서 편도체의 경보음이 멈추고, 대신 전전두 피질이 깨어나 ‘생각하는 믿음’이 자라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 근력, 곧 영적 근력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성경의 명령이 무려 365번 반복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뇌와 영혼을 모두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억누를수록 그것은 무의식 속에서 더 큰 불안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방법은 기도와 호흡, 그리고 안식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호흡은 느려지고, 전전두 피질은 ‘안전하다’는 신호를 받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예수님께서 주신 평안은 단순한 마음의 안정이 아니라, 두려움의 회로를 근본적으로 끊어내는 은혜입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 우리의 불안을 맡길 때, 뇌의 편도체는 “지금은 생존이 아니라 신뢰의 시간”이라는 신호를 받습니다.
또한 감사는 불안한 뇌를 안정시키는 가장 강력한 영적 호흡입니다. 감사할 때 우리는 현실의 결핍보다 하나님의 충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순간, 두려움은 자리 잃은 손님처럼 조용히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미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자신을 비난하고, 타인을 판단하며, 스스로를 정죄합니다. 이 역시 두려움의 다른 형태입니다. ‘나는 사랑받지 못한다’는 두려움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사 43:1~4). 이 진리를 붙들 때 전전두 피질은 활짝 열립니다. 뇌과학적으로도, 자신과 타인을 긍정할 때 집중력과 창조력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자타 긍정이 아니라 ‘하나님 긍정’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자신을 긍정할 수 있고, 타인도 품을 수 있습니다.
용서와 연민, 사랑과 수용, 감사와 존중, 이 여섯 가지 덕목은 단순한 심리학적 기술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이며(갈 5:22),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마음 근력’은 성령 안에서 단련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이 까칠해지는 이유는 근육이 약해지듯 마음의 근력도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고후 4:16). 기도는 마음의 헬스입니다. 묵상은 내면의 요가입니다. 감사는 영혼의 수영입니다. 이 모든 영적 습관은 전전두 피질을 활성화시키며, 우리를 두려움이 아닌 평안의 사람으로 세웁니다. “그가 네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뇌와 감정의 경계를 지키십니다.
잠들지 못하는 밤, 그 안에는 늘 두려움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 사람과의 관계, 스스로에 대한 불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밤에도 안식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니 내가 평안히 눕고 자리이다”(시 4:8). 이 믿음은 단지 마음을 달래는 주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평안은 우리 뇌 속 ‘경보 시스템’을 실제로 멈추게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쉼이야말로, 최고의 수면제이며 최고의 행복 비결입니다.
세상은 행복을 ‘무엇을 이루는가(Doing)’에 두지만, 성경은 행복을 ‘하나님과 함께 있음(Being with God)’에 둡니다.“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부족함이 없나이다.”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기로 결단하는 순간, 우리의 행복은 세상이 건드릴 수 없는 ‘언터처블(Un-Touchable)’한 상태가 됩니다. 오늘도 이렇게 고백합시다. “나는 이제 행복할래.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믿음은 그 본능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편도체가 불안을 외칠 때, 전전두 피질의 믿음이 대답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그때 비로소 우리는 두려움의 사람에서 평안의 사람, 생존의 인생에서 은혜의 인생으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그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인간, ‘그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의 회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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