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27)
죽음은 끝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김여환 가정의학과 전문의는 7년간 호스피스 병동에서 천 번이 넘는 죽음을 지켜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사는 사람이 잘 죽는다.” 이 단순한 한마디는, 죽음을 두려움이나 비극으로만 여기던 우리의 생각을 흔듭니다. 그녀는 죽음을 “삶의 결과물”이라 표현했습니다. 삶이 그릇이라면, 죽음은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의 향기를 세상에 마지막으로 내뿜는 순간입니다.
죽음은 우리 의지로 멈출 수 없는 사건이지만, 어떤 죽음을 맞이하느냐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죽음은, 우리가 쌓아온 삶의 총결산이자, 그 결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죽음의 승리자’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피하신 분이 아니라, 죽음을 통과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움으로 맞는 존재가 아니라, 그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지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잘 죽는 삶”의 복음적 의미입니다.
‘호스피스’라는 단어는 원래 ‘여행자가 쉬어가는 여관’을 뜻합니다. 그녀는 이곳을 “하늘나라로 가기 전 잠시 들르는 인생의 공항”이라 불렀습니다. 얼마나 신앙적인 표현입니까. 우리 모두는 지금 ‘하늘 본향으로 가는 순례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목적지가 아니라, 잠시 머무는 여정의 중간 지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낯선 문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문입니다.
주님께서 “너희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1~2) 하신 그 약속처럼, 호스피스 병동의 ‘인생 공항’은 바로 그 약속의 그림자 같습니다. 떠남은 끝이 아니라 돌아감이며, 이별은 사라짐이 아니라 만남의 예고입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가방’을 남긴 이는, 청각장애를 가진 암 환자 옥순 할머니였습니다. 그녀는 평생 자신보다 더 약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선이 할머니의 눈이 되어 주었고, 그녀는 선이 할머니의 귀가 되어 주었습니다. 두 분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며 사랑의 완성체로 살아냈습니다.
그런데 죽음이 다가오자,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문병객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들고 온 것은 돈도, 화려한 선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서 받은 사랑의 기억이었습니다. 김여환 의사는 그때 깨달았다고 합니다. “죽음은 공평하지만, 인생 가방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는 모두 다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싸 모으는 재물과 명예는 죽음 앞에서 모두 놓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썩지 않고, 하늘 곳간에 쌓이는 유일한 보물입니다. 주님께서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 6:20)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죽음에 대해 ‘초무관심’합니다. 죽음은 언제나 뉴스 속 이야기, 남의 일처럼만 여겨집니다. 하지만 의사는 말합니다. “죽음을 외면하는 사람일수록, 죽음 앞에서 가장 당황합니다.” 죽음을 ‘코끼리 만지기’처럼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거울입니다.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두려워했고, 무엇을 남겼는지를 보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얻기 위하여 초상집에 가라”(전 7:2)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죽음을 묵상할 때 비로소 진짜 삶의 가치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김여환 의사는 말합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죽어감’이 있습니다.” 그 ‘죽어감’의 과정이야말로, 삶의 본질을 정리하고, 진짜 자아와 하나님 앞에 마주 설 기회를 주는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날마다 옛 사람의 죽어감과 새 사람의 살아감 속에서 성화되어 갑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호스피스의 삶입니다. 육신의 죽어감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듯, 신앙의 죽어감도 참된 부활의 은혜로 이어집니다. 죽어감은 끝이 아니라, 새 생명의 문턱입니다.
죽음은 누구나 홀로 건너야 하는 강입니다. 김여환 의사는 『혼자 가야 해』라는 동화를 통해, 그 길을 ‘쪽배를 타고 떠나는 여정’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이 여정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 주님은 우리보다 먼저 그 강을 건너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를 맞이할 자리를 예비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배를 밀어주시는 손이요, 저편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김여환 의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존엄하게 죽는 사람은, 존엄하게 산 사람이다.” 그 말은 곧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산 사람만이, 하나님 품에서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다.” 존엄은 인간의 품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은혜입니다. 어떤 이는 죽음을 불행으로 받아들이지만, 성경은 오히려 말합니다.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히 보시도다.”(시 116:15)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는 영광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호스피스에서 천 번의 죽음을 지켜본 의사는, 결국 천 번의 ‘삶’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은 신앙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잘 사는 삶이란, 단순히 오래 사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죽음을 미리 배우는 자만이, 참된 생명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죽어감’의 하루를 삽니다. 그러나 그 하루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질 때, 우리의 마지막 숨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가장 아름다운 찬양이 될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11:25~26)
'신앙으로 사는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항상 정신을 새롭게 하라 (0) | 2025.11.02 |
|---|---|
| 물러섬의 지혜, 기다림의 은혜 (0) | 2025.11.02 |
| 두려움을 넘어서는 믿음의 삶 (0) | 2025.11.02 |
|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서두르는 인간 (0) | 2025.11.02 |
| A.W. 토저의 예언적 통찰을 통해 본 오늘의 교회와 사역자들 (0) | 2025.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