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마태복음 10:12~13)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유럽 대륙을 뒤덮던 1934년, 독일의 거리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유대인 소년 ‘헤인즈’는 친위대의 폭력과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날마다 도망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혔습니다. 친위대원들과 마주친 것입니다.
소년의 앞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습니다. 싸우거나, 피하거나. 그러나 헤인즈는 제3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싸움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진심 어린 말은 상대의 분노를 누그러뜨렸고, 그는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깨달았습니다. “말로도 싸움보다 더 큰 힘을 낼 수 있구나.” 그는 대화와 설득의 힘으로 평화를 만들어가는 법을 배워나갔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는 세계 여러 나라의 분쟁을 중재하며 수많은 평화 협정을 이끌어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미국의 정치가, 헨리 키신저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복음적인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예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제자들은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안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분쟁 대신 평안이 임하고, 두려움 대신 위로가 전해져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하는 복음 자체가 ‘화평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말은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내기보다, 상처를 싸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분열을 일으키기보다, 연합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의 평안을 흘려보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이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한복음 14:27) 그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이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전쟁 한가운데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내적 쉼입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평안의 사역’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말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평안을 빌어주는 사람’,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혹시 당신의 주변에 분노와 오해로 얼룩진 관계가 있습니까? 그곳에 먼저 평안을 빌어주는 사람이 되어보십시오. 그 집이, 그 사람이, 그 공동체가 합당하다면 그 평안은 그곳에 머물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더라도,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당신이 흘려보낸 평안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젠가 당신의 마음에 다시 돌아와 더 깊은 주님의 평안으로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제가 가는 곳마다 평안이 머물게 하소서. 분노의 자리에서 침묵하게 하시고, 다툼의 자리에서 화해를 말하게 하소서. 제 말과 행동을 통해 주님의 평화가 흘러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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