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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기름부음

등불은 있으나 기름이 없는 시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3~14)

한 마을에 가뭄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자 사람들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도는 '기우제 전문가'를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소문에 용하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온 마을 사람들이 몰려가 큰돈을 들여 그를 초청했고, 그가 이상한 몸짓을 하며 하늘을 향해 소리치면 사람들은 숨죽여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어쩌다 비가 내리면 그 사람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비가 오지 않으면 사람들은 "
정성이 부족했다"며 더 큰 굿판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왜 비가 오는지, 구름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마을 자체의 저수 시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는 묻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누가 더 용한가'에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경제는 흔들리고, 미래는 불투명하며, 마음 둘 곳 없는 이들이 점점 늘어갑니다. 이런 불확실함 속에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해답을 가진 누군가'를 찾아 나섭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현상은 낯설지 않습니다. 유명한 사역자, 신비한 능력을 가졌다는 목회자,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는 이의 집회에는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몰립니다. 저마다 마음속 깊은 갈증을 안고서 말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인간의 갈증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사마리아의 한 여인이 정오의 뜨거운 햇볕 아래 물을 길으러 우물에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 우물은 조상 야곱이 판 우물이었고, 여인은 날마다 그곳에 와서 물을 길어야 했습니다. 마시고 또 마셔도 다시 목이 마르는 것이 그 우물물의 한계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여인은 반문합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이 여인의 반문은 사실 오늘 우리의 반문이기도 합니다. "
지금까지 이 사역자를 통해 은혜받아 왔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야곱의 우물물을 마신 사람은 다시 목이 마릅니다. 어제 은혜받은 사람이 오늘 또 새로운 집회를 찾아 나서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문제는 우물물 자체가 아니라, 그 우물이 자신 안에서 솟아나는 샘이 아니라 늘 밖에서 길어 와야 하는 우물이라는 데 있습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물고기 한 마리를 쥐여주면 그날 하루는 배부르지만, 내일이 되면 그는 다시 굶주린 채 누군가를 찾아 헤매야 합니다. 반면 그물 짜는 법과 물고기가 모이는 곳을 알려주면, 그는 더 이상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이루어져 온 많은 능력 사역은, 안타깝게도 물고기를 나눠주는 방식에 가까웠습니다. 능력 있는 한 사람의 사역자가 무대 위에 서고, 회중은 그 사역자를 통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립니다. 병이 나으면 감사하고, 낫지 않으면 더 능력 있다는 다른 사역자를 찾아 떠납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회중이 결코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언제나 누군가에게 기대야 하는 처지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일부 사역자들 스스로도 자신에게 임한 능력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사역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원리를 모르니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니 나눠줄 수도 없습니다. 그저 신비한 무엇인가로 남겨둔 채, 회중은 그 신비 앞에서 더욱 의존적이 되어갑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열 처녀의 비유를 떠올려 봅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모두에게 등은 있었습니다. 다섯은 슬기로웠고 다섯은 미련했다는 차이는, 등의 유무가 아니라 기름병을 준비했는가에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지고 신랑이 더디 오자 등불은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그제야 기름을 빌리러 다녔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습니다.

이 비유는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믿는 이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각 사람 안에 등불, 곧 쓰임받을 수 있는 잠재된 가능성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문제는 그 등을 밝힐 기름을 스스로 준비했는가입니다. 기름은 남에게서 매번 빌려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그릇에 담아 늘 곁에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에서 이 '기름'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원리에 대한 이해입니다. 왜 은혜가 임하는지, 어떤 원리로 하나님의 능력이 일하는지를 스스로 깨달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남의 등불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등불을 밝힐 수 있습니다. 반대로 원리를 모른 채 그저 남이 밝혀준 불빛 아래 머문다면, 그 사람이 자리를 뜨는 순간 우리는 다시 어둠 속에 남겨지고 맙니다.

예수님은 한때 율법교사들을 향해 이렇게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 "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지식의 열쇠를 손에 쥐고도 그 문을 열어 사람들을 들여보내지 않은 것이 그들의 죄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영적 지식과 원리를 소유한 이들이 그것을 회중과 나누기를 주저한다면, 이는 같은 책망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신비롭게 포장할수록 그 사역자의 입지는 굳건해질지 모르지만, 정작 회중은 언제까지나 문 밖에 머물게 됩니다. 참된 목자의 마음은 자신이 아는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양 무리가 스스로 푸른 초장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어야 합니다.

경제가 흔들리고 앞날이 보이지 않는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확실한 답을 가진 누군가에게 매달리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로와 능력은 밖에서 잠시 빌려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고자 하신 것이 바로 그 샘물이었습니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화려한 무대 위의 능력자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깨달아 알고 그 은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근육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에게 이미 등불은 주어져 있습니다. 다만 그 등불을 밝힐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 바로 이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주어진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