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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

따름의 조건 - 제자도의 본질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1. 25.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 9:57~62)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이 얼마나 쉽게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주님 어디든 따르겠습니다.” “주를 따르겠습니다.” 마음에는 열정과 결단의 불꽃이 있고, 입에는 헌신의 언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9장 57~62절은 그 ‘따름’이 결코 인간의 결심이나 열심만으로 완성되지 않음을 통렬하게 보여줍니다. 이 본문은 세 사람의 응답을 통해 제자도의 불가능성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실 자리를 드러냅니다. 아래에서 한 사람씩, 그리고 전체 문맥을 따라 차근차근 살펴 보겠습니다.

이 짧은 사건들은 변화를 일으키는 큰 이야기의 바로 아래에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시고, 그 아래에서 제자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 당혹스러워합니다. 얼마 전 예수께서 파송하신 때에, 제자들에게도 권능이 주어졌지만 그 권능을 자기 것으로 오해한 제자들은 실패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 하시고, 겨자씨 같은 믿음의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그 바로 뒤에 세 사람의 응답 장면이 이어집니다. 여기서 핵심은 ‘누가 큰가’로 싸우는 제자들의 태도, 그리고 사람의 능력에 기대는 모든 태도를 깨뜨리는 예수님의 교육입니다.

첫 번째는 “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리이다.” 겉으로는 가장 열렬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 말은 예수님의 길이 편안과 영광의 길이 아님을 알리십니다. 이 사람의 “따름”에는 자기 영광을 기대하는 마음, 안락과 보장을 요구하는 기색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는 그런 사람에게 머무를 곳도 없음을 선언하십니다. 열심만으로는 예수의 길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비를 장사하게 허락하소서.” 이 응답은 선한 것처럼 들립니다. 효도까지 하겠다는 사람이 어떻게 탈락일까요? 예수님은 선의 이면에 남아 있는 ‘자기 주권’을 보십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여기서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가리키며, 예수께서는 그가 세상적 책임과 전통을 이유로 주님의 부르심을 미루려는 것을 꿰뚫어 보십니다. 참된 제자는 ‘나로 먼저’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내 삶의 주인이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이 사람은 조건을 달아 따르려 합니다. “조금만 시간을 달라”는 합리적 요구처럼 보이지만 예수는 단호합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쟁기는 농부의 생계이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도구입니다. 뒤를 돌보는 것은 과거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드러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향해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자도는 조건과 미련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세 사람 모두 각각 다른 이유로 ‘
불합격’입니다. 이는 곧 인간의 어떤 노력도 스스로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게 만들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제자도의 길은 인간의 능력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예수를 믿게 하시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예수는 변화산에서 ‘겨자씨 같은 믿음’을 말하셨습니다. 겨자씨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여서, 인간의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소유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열심을 점검하십시오. 열심은 귀합니다. 그러나 열심의 근원이 어디인가를 살피십시오. 내가 중심이라면 그 열심은 위험합니다. 제자도의 열심은 ‘내가’ 아닌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재정비하십시오. 가족·전통·책임은 선하나, 그것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가로막을 때가 있습니다. ‘나로 먼저’라는 말이 나오면, 주님의 부르심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뒤돌아보면 희망을 잃고 잔여물에 매달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끌어내신 곳에서, 우리 눈은 오직 앞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주시는 것임을 고백하십시오. 우리 노력으로 자신을 바꾸려는 시도를 멈추십시오. 먼저 주님께 우리의 무능을 고백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그분의 생명을 이루어 주시길 구하십시오.

본문은 우리를 실망시키기 위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무능을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개입하실 자리를 마련합니다. 우리가 ‘
없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있다’로 응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죄와 죽음을 담당하셨기에, 우리의 따름은 더 이상 성취의 수단이 아니라 응답의 자리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은 우리의 계획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태워 버리고 새 생명으로 만드는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그 부르심 앞에서 진실하게 “
주여, 이렇습니다. 저는 없습니다. 오셔서 제게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고백할 때, 주님은 우리를 참된 제자로 만드시리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