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 말씀 묵상/레위기

레위기 - 소금으로 절여진 사람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2.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제단에 올리지 말지며,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위기 2:11~13)

어느 날 어떤 집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교회를 다닌 지 삼십 년이 넘었고, 성가대에서 수십 년을 봉사했으며, 성경을 몇 차례나 통독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녀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가득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왜 이럴까요. 며칠 전에 옆집 사람이 저한테 함부로 대하는데, 그 사람이 너무 미워서 밤새 잠을 못 잤어요. 교회를 이렇게 오래 다녔는데, 저는 왜 아직도 이 모양일까요?" 목사님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습니다. "집사님, 그게 바로 당신이 아직 정직한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
신자'와 '불신자'를 단순하게 구분해왔습니다. 교회에 다니면 신자, 다니지 않으면 불신자, 세례를 받았으면 신자, 받지 않았으면 불신자, 그 경계선은 명확하고, 그 선을 넘은 사람은 이제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태어납니다. 그 탄생의 본질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상태, 죽음의 상태입니다. 예수를 믿고 성도가 되었다고 해서 그 본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내면에도 여전히 시기하고, 분노하고, 교만하고, 두려워하는 옛사람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삼십 년 신앙 경력의 집사님이 밤새 이웃을 미워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차이는 이것입니다. 불신자는 자신의 그 모습을 정당화하거나 외면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자신의 경력과 지식과 직분을 근거로
"나는 그래도 신자야"라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수밖에 없는 자"임을 고백하는 것이 성도의 자기 이해입니다.

레위기 2장은 소제, 곡물로 드리는 제사에 대한 규례를 담고 있습니다. 제물은 고운 가루였습니다. 밀을 찧고 또 찧어서 완전히 부서진 상태, 그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재료였습니다. 그런데 11절에서 하나님은 이상한 명령을 하십니다.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는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로 불사르지 말라."

누룩과 꿀, 이 두 재료는 가루를 맛있게 만들고, 보기 좋게 만들고, 먹음직스럽게 부풀리는 것들입니다. 누룩은 빵을 부풀리고, 꿀은 달콤함을 더합니다. 이것을 넣으면 황량한 가루 반죽이 탐스러운 빵이 됩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은 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더 나은 모습으로 포장하고 싶어 합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신앙 경력은 삶의 훈장이 되고, 성경 지식은 영적 우월감의 근거가 되고, 봉사와 헌신의 이력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자격처럼 느껴집니다. 자신의 믿음에 누룩을 넣어 부풀리고, 꿀을 발라 달콤하게 코팅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랜 금식 기도의 이력을 마음속 깊이 쌓아두고,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를 빠짐없이 낸 기록을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은밀한 계약서처럼 여깁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를 신앙으로 잘 키웠다는 자부심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세우는 기둥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멋있게 가공된 빵이 아닙니다. 완전히 부서진 가루, 그 비참한 상태 그대로입니다. 자신을 꾸미지 않고, 아름답게 만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망가진 본성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소제의 정신입니다. 부서진 가루,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수년간 사역하고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했고, 그의 간증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혼자 있는 시간에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왜 사람들의 칭찬이 이렇게 좋은가. 나는 왜 내 헌신이 알려지기를 원하는가. 나는 하나님을 위해 아프리카에 간 것인가, 아니면 이 칭찬을 위해 간 것인가." 그것은 그의 신앙이 무너지는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장 솔직하게 가루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누룩도 꿀도 없이, 자신의 민낯을 하나님 앞에 올려놓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십니다. 13절에 이르면 더 깊은 진실이 드러납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소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부패하지 않습니다. 오래전부터 소금은 언약의 상징이었습니다. 변하지 않는 약속, 취소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소금은 또한 저주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고대에는 정복한 땅에 소금을 뿌려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했습니다. 소금이 뿌려진 땅은 생명이 없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
소금을 치라'는 명령은 역설적입니다. 완전히 부서진 가루에, 저주받은 상태에, 어떤 아름다움도 남지 않은 그 자리에 소금을 치라는 것입니다. 저주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있습니다.

저주의 가장 밑바닥, 아무것도 자랄 수 없을 것 같은 그 황무지 아래에 변하지 않는 은혜가 깔려 있습니다. 그것이 '
언약의 소금'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서져 있든, 얼마나 저주받은 상태이든, 하나님의 용서와 받아들이심은 변하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부서진 가루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존재가 나아가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죽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완전히 가루가 된 인간, 저주의 소금이 뿌려진 존재, 그 존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죽어야 할 그 죽음을 예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저주받은 가루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도는 바로 이 은혜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처음 이야기의 그 집사님이 이웃을 미워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숨기거나
"그래도 나는 오래 믿은 사람인데"라고 방어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들고 나올 때, 거기에 언약의 소금이 작동합니다. 변하지 않는 용서, 취소되지 않는 은혜가 그 부서진 가루 아래 깔려 있습니다.

성도의 삶이란 스스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삶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누룩처럼 부풀리고, 헌신을 꿀처럼 달콤하게 포장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부서진 가루인지를 알고, 그 저주받은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 변하지 않는 언약의 소금, 곧 예수님의 은혜가 깔려 있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고백입니다.

"나는 여전히 저주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나를 위해 대신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의 은혜로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소금으로 절여진 사람입니다. 자신의 부패를 막을 수 없어 부서진 채로 나아가되,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절여진 사람이 이 시대의 성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