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일 그 예물이 가축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그가 제단 북쪽 여호와 앞에서 그것을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것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레위기 1:10~11)
어떤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오랫동안 뜨개질을 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한 코 한 코, 수백 시간을 쏟아 스웨터를 완성했습니다. 아들에게 건네는 순간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그것을 받아 들고 잠시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솔직히 이 색깔은 제 취향이 아니에요."
방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에 스치는 것은 단순한 서운함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정성이, 자신의 사랑이 거절당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꿈틀거렸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 장면에서 아들을 나무랍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어머니의 마음속에 꿈틀거린 것도 그냥 지나쳐선 안 됩니다. 그것은 "내 정성을 알아줘야 해"라는 요구였습니다. 그 요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솟아오르는 차갑고 날카로운 감정이 바로 성경이 '자기 의'라고 부르는 것의 일상적인 얼굴입니다.
레위기 1장을 펼치면 제사 규정이 등장합니다.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드릴 때,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려야 했습니다. 새처럼 피가 적은 제물은 제단 곁에 흘리게 했습니다. 뿌리든 흘리든, 그 장면의 핵심은 피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래도록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해왔습니다. "피는 죄 용서의 수단이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우리는 매우 교묘한 함정에 빠집니다. 용서를 원하는 사람이 제물을 가져옵니다. 피가 뿌려집니다.
그리고 그는 안도하며 '이제 됐다'는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잠깐, 그 안도감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죄가 얼마나 무겁고 자신이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지를 직면한 자의 안도입니까? 아니면, 일종의 '처리'를 완료한 자의 홀가분함입니까?
피를 용서의 도구로만 삼는 순간, 제사는 하나의 거래가 됩니다. "나는 정성껏 제물을 바쳤으니, 하나님은 용서해주셔야 한다." 그 마음속 어딘가에, 자기 의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성경은 피가 그보다 훨씬 먼저, 훨씬 깊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증언합니다.
성경에서 피가 처음 땅에 떨어진 것은 레위기가 아닙니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들판 어딘가였습니다. 형이 동생을 쳤고, 동생은 쓰러졌습니다. 아벨의 피가 흙 위에 스며들었습니다.
이 장면을 단순히 '형이 나쁜 짓을 한 사건'으로 읽으면, 우리는 또다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성경은 가인이 왜 아벨을 죽였는지를 아주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그때 가인의 안색이 변했습니다.
왜 안색이 변했을까요? 그는 정성을 다했습니다. 땅의 소산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수고였고, 자신의 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에게 그 순간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정성이, 나의 의가 인정받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 모욕감 아니, 더 정확히는, 자기 의가 흔들리는 공포가 분노로 폭발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아벨을 향했습니다. 아벨을 죽인 것은 가인이라는 한 개인이 아니었습니다. 아벨을 죽인 것은 '자기 의를 지키려는 인간의 속성' 그 자체였습니다. 가인은 그것의 이름이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통스러운 질문 앞에 섭니다. 하나님은 왜 아벨이 죽는 것을 막지 않으셨는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가인의 손을 멈추실 수 있었습니다. 아벨을 피하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아벨은 쓰러졌고, 피는 땅에 스며들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이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 내게 부르짖느니라." 피가 소리를 냈습니다. 땅이 증언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죽음을 허용하심으로써, 세상이 보지 못하던 것을 폭로하셨습니다. 자기 의를 지키기 위해 타인을 죽이는 것이 죄의 본질이며, 인간이 땅 위에서 행하는 모든 것의 밑바닥에 깔린 어둠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아벨의 피는 아벨 한 사람의 억울함만을 외친 것이 아닙니다. 그 피는 인류 전체의 죄를, 자기 의로 물든 이 땅의 저주받은 본질을 하나님 앞에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받아낸 땅은 이제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이 이 땅에서 두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쌓고, 이루어도, 그것이 아무리 빛나고 아름다워 보여도, 그 땅은 이미 저주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로는 그 저주를 뒤집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피는 그것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분 앞에 선 사람들 중에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인과 다른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들도 정성을 다했습니다. 십일조를 드렸고, 금식을 했고,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의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화 있을진저"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그들의 안색이 가인처럼 변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아벨을 죽인 바로 그 속성이, 수천 년을 건너 예수를 죽였습니다. 피가 또 땅에 흘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예수의 피는 단순히 용서의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그 피는 아벨의 피가 고발했던 모든 것, 자기 의로 가득한 인간의 저주받은 본성을 정면으로 짊어지고 쏟아진 피였습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한 것을, 세상이 예수에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은혜를 '내가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혹은 '내가 회개했더니 하나님이 용서해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시작점은 '내가 무언가를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의가 살아 있습니다.
진짜 은혜의 현장은 그 자기 의가 완전히 무너지는 자리입니다. "나는 저주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쌓아온 것들이, 내가 자랑스러워하던 것들이, 사실은 저주받은 땅 위에 세워진 것들입니다. 나는 아벨을 죽인 가인입니다. 나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과 같은 뿌리에서 왔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무너지는 것, 그 자리가 은혜의 현장입니다. 회사에서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며 동료를 몰아붙이다가, 문득 자신의 안색이 변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는 자리, 오랫동안 '나는 충분히 헌신했다'고 생각해온 믿음이 어느 날 한 줄기 의심으로 흔들리는 자리, 내 정성이 인정받지 못했을 때 마음속에서 차갑게 솟아오른 그 감정의 정체를 직면하는 자리, 바로 거기에서, 제단의 피가 말을 겁니다.
레위기의 제사장이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때, 그 피는 이것을 선언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받을 것은 저주밖에 없다. 그 저주를 취소할 수 있는 인간의 의는 없다. 이 제물의 피는, 그 저주를 짊어지고 쏟아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는 그 모든 선언의 완성이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에게서, 세상이 예수에게서 빼앗은 그 피가, 이제는 저주를 선고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삼키고 새 생명을 여는 피가 되었습니다.
성도란 그 피의 의미를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 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피로 인해 저주에서 건져진 것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가인처럼 안색을 바꾸며 자기 의를 지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나는 저주받을 자였습니다"라는 고백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피는 용서를 말하기 전에, 먼저 이것을 말합니다. "너는 저주받은 땅 위에 서 있다. 네 손으로는 아무것도 의가 될 수 없다." 그 말을 듣고 무릎이 꺾이는 자리, 그 자리에서 비로소 복음은 복음이 됩니다. 주님의 의가 나의 의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의가 전혀 없기에 주님의 의만이 전부가 되는 그 자리입니다. 그것이 제단 앞에서, 피가 땅에 떨어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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