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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마가복음

마가복음 - 누가 진짜 귀신 들린 사람입니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29.

마가복음 5장 1~20절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1)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에서 거센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그 사나운 물결이 곧 잠잠해졌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배가 건너편 기슭에 닿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그곳은 거라사인의 지방,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사는 땅입니다. 예수님이 발을 내딛으시자 무덤 사이에서 한 사람이 뛰쳐나옵니다. 마가는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그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처음에 마을 사람들은 그를 쇠사슬로 묶었습니다. 그는 그 사슬을 끊었습니다. 더 튼튼한 고랑을 채웠지만 그것도 부숴 버렸습니다. 결국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게 되었고, 그는 마을에서 쫓겨나 무덤 사이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산과 무덤을 오르내리며 소리를 지르고, 날카로운 돌로 제 몸을 찍어 상처를 냈습니다. 오늘날로 옮겨 보면 어떨까요? 병원에서 몸을 묶고 약을 먹이는 사람의 모습이 아마 이와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쉽게 판단합니다. "
귀신 들린 사람은 저런 사람이다. 나는 아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밝혔습니다. 사회는 오랫동안 '미친 사람'을 병원과 감옥에 가두어 왔습니다. 그렇게 격리해 놓고 나면 바깥에 남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정상이라는 울타리는 미친 사람을 가둠으로써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울타리 밖에 있으니 정말 안전한 것일까요? 성경은 조금 다르게 말합니다. 자기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이 오히려 그것을 잃는다고 합니다(마 10:39).

이런 사람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젊은 시절부터 밤낮없이 일해서 가게도 하나 얻고 집도 샀습니다. 가족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정작 가족은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쉰이 되어 몸이 무너지고서야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묻습니다. 그는 병원에 갇힌 적도, 사슬에 묶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살리려던 그 애씀이 자기를 조금씩 죽이고 있었습니다. 밖에서 보면 성실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어떻게 정상이라고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우리의 옛 모습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고, 세상 풍조를 따랐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고, 육체의 욕심대로 살았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합니다(엡 2:1~3). 이 목록에는 무덤에 사는 사람만 들어 있지 않습니다. 성실하게 사는 이웃도, 교양 있는 사람도, 심지어 교회에 다니면서 내심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우리도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절망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4~6절이 진짜 복음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에 그분의 백성을 참여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방향은 그래서 분명합니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으니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으며 남은 육체의 때를 살아갑니다(빌 3:17~21). 바울은 그렇지 않은 이들을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의 신은 배이고, 그들의 생각은 땅의 일에 매여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의 계획이 온통 땅에 붙잡혀 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하라"(고후 13:5).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자랑하지 않고 세상의 강함만 좇는다면, 자기를 점검해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거라사의 기슭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 사람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데 이 절은 조금 이상합니다. 사람이 달려오는 것 같지만, 실제로 달려온 쪽은 그를 사로잡고 있던 귀신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귀신들은 소리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압니다. 이분의 나타나심이 자신들의 끝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아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름을 물으시자 대답이 나옵니다. "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군대는 헬라어로 '레기온'이라고 하는데, 로마 군대의 한 단위로 수천 명의 병력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야 했는지 이제 이해가 됩니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세력이었습니다.

귀신들은 자기들을 그 지방에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고, 마침 산자락에서 풀을 뜯고 있던 큰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시자 귀신 들린 돼지 떼 이천 마리가 비탈을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그냥 없애시면 될 텐데 왜 그들의 청을 들어주셨을까요? 예수님이 계시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돼지를 죽인 것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귀신들이 한 일입니다. 귀신은 자기가 들어간 것을 반드시 파멸로 끌고 갑니다. 한 사람 안에 있을 때는 그 사람을 파괴하고 있었고, 돼지 떼에게 들어가자 곧바로 돼지 떼를 파멸시켰습니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은 놀라서 읍내로 달려가 이 소식을 전합니다. 이천 마리를 치려면 여럿이 필요했을 테니 목격자도 많았을 것입니다. 돼지는 유대인에게 부정한 짐승이라서, 이렇게 큰 규모의 돼지 떼가 있었다는 것은 이곳이 이방인의 땅이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돼지 주인들도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 곁에 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사람은 옷을 입고 있었고, 정신이 온전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어제까지 사슬도 소용없던, 그 무덤의 사람입니다. 이제 그들이 무엇을 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
그들이 두려워하더라." 그리고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여러분, 이것을 기억해 두십시오. 표적과 기적을 보았다고 해서 사람이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사슬을 끊던 사람이 온전해지는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보았지만,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청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계산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고침받았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돼지 이천 마리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 손해를 누가 갚아 줍니까? 이분이 계속 이 마을에 계시면 다음에는 무엇이 무너지겠습니까? 우리 시대에도 낯설지 않은 계산입니다. 이런 광경을 상상해 봅시다. 어떤 마을에 오래 병들어 사람들을 괴롭히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청년이 나아졌는데, 그 일로 마을 사람들 몇이 큰 경제적 손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기 쉽습니다. "
그가 나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우리 사정이 이러니 더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거라사 사람들이 딱 그랬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 마을에 재산상의 이익을 안겨 주셨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떠나시려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오래 머물러 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손해를 보자 예수님에게 나가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이 가져다줄 유익이 필요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질문이 분명해집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을 마을 밖으로 몰아내고 사슬로 묶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귀신 들린 자를 말씀 한마디로 온전하게 하신 분에게 "
떠나 주십시오"라고 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누가 진짜 귀신 들린 사람입니까?

이 질문은 거라사에서 끝나지 않고 오늘 우리에게 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며 예배당에 옵니다. 예배를 드리고 헌금도 합니다. 그런데 그 뒤에 삶이 나아지기는커녕 손해가 이어지고, 몸이 병들고, 하는 일이 하나도 되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 마음에서도 이런 질문이 올라올 수 있습니다. "
예수를 믿는데 왜 이렇게 되는가?" 어떤 분은 교회를 옮기고 나서 혹시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 봐 마음 한편에서 겁이 났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우리 곁에 있는 실제 사연들이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모임에 다녀오다가 중앙선을 넘어온 차와 부딪혀 오래 입원했습니다. 어떤 가정은 일하러 나갔던 남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교회 안에도 중한 병을 앓는 분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 새로 등록하신 한 분은 오토바이를 타고 시장에 전도하러 가다가 사고를 당해 지금도 병원에 계십니다. 목사님은 그 병상을 찾아가 오늘 이 말씀을 전하고 왔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겪을 때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대하게 됩니까? "
예수님이 이 지방에서 떠나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습니까? 거라사 사람들의 마음은 먼 옛날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은 나 자신을 점검하는 거울입니다.

이제 이야기의 마지막입니다. 거라사 사람들이 떠나 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순순히 배에 오르십니다. 그때 고침받은 사람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
함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무덤에서 나와 처음으로 정신이 온전해진 사람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예수님 곁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부르실 때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막 3:14). 그러니 이 사람의 요청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이 대목은 참 묘합니다. 이 사람은 이제 막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제자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 무엇을 배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가장 확실한 설교를 맡기십니다. "네게 행하신 일을 말하라." 그는 자기가 겪은 그대로를 말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사슬도 소용없던 내가 말씀 한마디로 옷을 입고 앉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는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그 지방 열 개 도시, 곧 데가볼리에 퍼졌고, 듣는 사람마다 놀랐습니다. 자기들을 쫓아낸 마을에 예수님은 자기 이름을 전하는 한 사람을 남겨 두고 떠나신 것입니다.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군대귀신 들렸던 사람은 고침받았고,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고, 예수님이 명하시는 대로 집으로 가서 그분이 베푸신 긍휼을 전했습니다. 반면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여기던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이 계신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하고 그분에게 나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귀신 들린 사람입니까? 처음에는 고침받은 그 사람이 귀신 들린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진짜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여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눅 14:26~27). 그리고 이어서 망대를 세우는 사람과 전쟁에 나가는 왕의 비유로, 끝까지 갈 수 있는지 먼저 계산해 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뜻이 부서집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뜻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얻게 해 주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
다 이루었다" 하신 그분을 나의 주님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나는 어떤 예수님을 원합니까? 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자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싶고 그분과 함께 있고 싶습니까? 아니면 그런 예수님은 제발 우리 마을에서 떠나 달라고 하고 싶습니까? 우리 안에는 우상숭배라는 탐심이 있습니다. 이 탐심을 주님이 물리쳐 주시고, 주님을 더 깊이 알아 가며, 그분과 영원히 함께 있기를 소원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