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복음 6장 6~12절.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서 뜻밖의 벽을 만나셨습니다. 마가는 그 장면을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라고 적습니다. 어릴 적부터 예수님을 봐 온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 목수 아니야? 마리아 아들, 우리가 다 아는데"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잘 안다고 생각한 것이 오히려 눈을 가렸습니다. 사람들은 아주 오래 함께 산 가족을 두고도 "내가 걔를 제일 잘 알지" 하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전혀 몰랐던 얼굴을 보고 놀랍니다. 나사렛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혈과 육으로는 알았지만 그분이 누구신지는 몰랐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눈에 띄는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설득하려고 매달리지 않으셨고, "이래도 못 믿겠느냐" 하며 기적을 보여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조용히 고향을 떠나 다른 마을들을 두루 다니며 가르치셨습니다. 믿음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그다음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다시 부르십니다. 전에도 부르신 적이 있으니 이번 부르심은 보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자 보내지 않고 둘씩 짝지어 보내셨습니다. 율법에서는 재판에서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일을 결정하지 못하고,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정했습니다(신 19:15). 복음을 전하는 일도 증언이니, 혼자가 아닌 둘이 함께 서야 했습니다. 소풍 갈 때 짝꿍과 손을 잡고 걷던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낯선 곳에서는 옆에 한 사람만 있어도 마음이 든든합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까지 헤아리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앞 장에서 본 거라사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귀신 들린 사람은 무덤 사이에서 소리 지르던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정상이라 여기면서 돼지 떼를 잃은 손해 때문에 예수님께 "우리 마을에서 떠나 주십시오" 하고 말한 사람들도 귀신 들린 쪽이었습니다. 세상 풍속을 따라 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 성경은 이것을 공중 권세 잡은 자 아래서 사는 삶이라 부릅니다(엡 2:1~3). 육신의 정욕, 눈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쫓아 사는 삶인 것입니다(요일 2:15~16). 그러니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 매임에서 사람을 풀어 주는 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이 내리신 준비물 목록은 놀랍습니다. 지팡이 하나, 신 한 켤레면 됩니다. 빵도, 배낭도, 돈주머니도, 여분의 옷도 안 됩니다. 요즘 눈으로 보면 노숙자 차림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전도하러 가는데 옷도 단정하고 번듯해야 사람들이 신뢰하지 않겠어? 든든한 후원도 있어야 하고."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누구는 복음을 전하러 가면서 명함도 통장도 없이 나서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초라한 모습으로도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제자들의 겉모습이 아니라 제자들이 전하는 말씀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느 집이든 들어가면 그곳을 떠날 때까지 머물라고 합니다. 그 집이 제자들을 받아 준 것은 그냥 나그네를 대접한 차원이 아닙니다. 회개하라는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뜻이고, 그 집은 복음의 전초기지가 됩니다. 반대로 영접하지 않고 말도 듣지 않는다면 그곳을 떠날 때 발아래 먼지를 떨어 그들에게 증거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조금 뒤에 다시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한 일은 이렇습니다. 회개하라고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습니다. 이 세 가지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순서대로 이어져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받아들이는 일이 곧 귀신이 쫓겨 가는 일입니다. 제자들이 바른 기름은 당시 상처에 바르던 올리브기름이었는데, 그 기름은 이 치유가 제자들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권능임을 보이는 표였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새로운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시험을 이기시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외치시며 귀신을 쫓고 병자를 고치셨던, 바로 그 일을 맡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천국 복음의 첫마디는 언제나 "회개하라"입니다. 회개는 마음을 조금 고치는 일이 아닙니다. 가던 방향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일입니다. 지금껏 옳다고 믿던 가치관이 뒤집어지는 일입니다. 마치 길을 반대로 걷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병 고침 이야기가 나오면 마음이 솔깃해집니다. 오늘날에도 병을 고친다는 곳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갑니다. 하지만 몸의 병이 나아도 그 사람은 언젠가 다시 죽습니다. 병이 나을 거라는 기대 하나로 먼 곳까지 달려갔다가 끝내 낫지 못해 상처만 안고 돌아오는 분들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희망고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천국을 믿는다면 전할 말은 달라야 합니다. 병 고침보다 회개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죽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 복음은 병 낫는 이야기가 아니라 영원히 사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복음을 사람들이 환영할까요? 디모데후서 3장은 말세의 모습을 이렇게 그립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타락한 이후에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던 때가 있습니까? 자기를 사랑하려니 돈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니 더 움켜쥡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타락 이후로 세상은 늘 말세입니다.
야고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과 벗이 되려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이라고 합니다(약 4:4). "올해는 이 도시에서 장사해서 이익을 보겠다" 하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에게 "너희 생명은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라고 말합니다(약 4:13~16). 재물을 쌓은 부자들에게는 "울고 통곡하라"고 외칩니다(약 5:1~5).
이런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우리 집 문을 두드린다면, 반갑게 맞이하겠습니까, 문을 닫겠습니까? 우리 교회당 안에서도 이 세상 것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온 이유를 보면 대개 병 고침이나 먹을 것, 곧 내 삶을 더 넓히는 일이었습니다. 자아가 무너지고 예수님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회개를 구한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귀신이 쫓겨 가고 병이 낫는 것은 반기면서, 정작 내가 무너지는 회개는 반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접하지 않는 곳에서는 발의 먼지를 떨어 증거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사도행전에 그 장면이 그대로 나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자 온 시민이 거의 다 모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시기가 가득해 바울의 말을 반박했고, 경건한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선동해 두 사람을 쫓아냈습니다. 경건한 귀부인들은 왜 복음을 싫어했을까요? 율법적인 자기 의로 경건을 지키고 있었는데, 복음이 그 자기 의를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는 발의 먼지를 떨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놀랍습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쫓겨나는 자리에서 기쁨이 넘쳤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때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미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복음의 무서움과 단단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3장 4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방인들은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했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고 합니다. 누가 영생에 합당한지는 복음을 전해 보면 드러납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하는 이 복음을 기쁘게 받는 사람은, 자기에게 의가 하나도 없음을 인정한 사람입니다.
고린도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자 사람들이 대적하며 비방했습니다. 이번에는 바울이 옷을 털며 말했습니다.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그러고는 곧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은 회당 바로 옆이었습니다. 한쪽 문은 닫혔지만 바로 옆에서 다른 문이 열린 셈입니다. 영접하면 머물고, 거절하면 털고 떠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글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예수님은 믿지 않는 고향을 떠나셨고, 제자들을 둘씩 빈손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들이 전한 첫 말씀은 "회개하라"였습니다. 병 고침도, 번영도, 내 삶의 확장도 아니었습니다. 이 복음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쉼이고 영생이지만, 자기 의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걸림돌입니다. 그래서 어떤 집은 문을 열고 어떤 마을은 문을 닫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복음을 듣고 있습니까? 내 소원을 들어주고 내 삶을 넓혀 주는 이야기만 듣고 싶습니까, 아니면 내 자아가 무너지고 예수님으로 채워지는 복음을 기뻐하며 듣겠습니까? 제자들은 빈손으로 나갔지만 그 손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말씀이 들려 있었습니다. 복음은 그렇게 둘씩, 한 집 한 집, 땅끝까지 전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쫓겨나면서도 기쁨이 충만했던 제자들의 모습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긴 사람들의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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