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복음 4장 26~34절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어느 목수의 작업실에 두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한 사람의 눈에는 작은 나무 부스러기 하나가 박혀 있었고, 다른 사람의 눈에는 커다란 들보가 가로질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에 들보가 박힌 사람이 오히려 상대방의 눈 속 부스러기를 손가락질하며 나무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하신 이 비유는 우스꽝스럽지만, 사실 우리 모두의 자화상입니다.
빛이 없을 때 우리는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방 안이 캄캄하면 거울 앞에 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불을 켜는 순간, 비로소 자신의 얼굴에 묻은 얼룩이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삶에 켜진 등불이십니다. 그 빛이 진짜로 나를 비추면, 나는 더 이상 남의 눈 속 티끌을 찾아다닐 여유가 없습니다. 내 눈에 박힌 들보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빛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을 율법의 의로는 흠 없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그 빛을 만난 뒤, 그는 완전히 다른 말을 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빛이 그를 비추자 그는 자신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음을 인정하게 되었고, 동시에 그 모든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빛에 비추인 인생의 열매입니다.
이 열매가 어떻게 맺히는지를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농부의 그림으로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막 4:26~27).
한 농부를 상상해 보십시오. 봄에 논에 볍씨를 뿌리고 나면, 그는 그날 저녁 여느 때처럼 잠자리에 듭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다시 하루를 삽니다.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또 잠듭니다. 그렇게 자고 깨고, 자고 깨고 하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가 특별히 무언가를 조작하지 않아도 씨는 스스로 싹을 틔우고, 줄기를 세우고, 이삭을 맺습니다. 농부는 씨앗 속에서 정확히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나는지, 뿌리가 어떻게 물을 빨아올리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씨를 뿌렸을 뿐이고, 나머지는 땅과 하늘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지, 그 씨를 자라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세 부류가 있었습니다. 열심당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손의 칼로 세우려 했습니다. 로마를 무력으로 몰아내고 다윗 왕국을 재건하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 믿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할 시간을 계산하려 했습니다. 예언을 짜 맞추고 날짜를 셈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철저한 순종과 열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앞당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세 부류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내가 이루는 것'으로 착각했다는 점입니다. 독일성서공회 주석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끊임없는 활동을 예측하면서 끈기 있게 추수 때를 기다리는 믿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할 것이다." 힘으로 세우려는 사람도, 날짜를 계산하려는 사람도, 열심으로 앞당기려는 사람도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놓칩니다. 오직 기다리는 믿음만이 그것을 발견합니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 성장 그래프를 만들어 놓고 올해 목표 숫자를 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종말의 연도를 계산하며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 전도 집회로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자"고 외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중심적으로 소유하려는 유혹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거두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추수 때를 여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우물가에 앉아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구하러 마을에 간 사이,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다섯 번 결혼했고 지금은 남편 아닌 남자와 사는, 마을에서 가장 부끄러운 시간에 홀로 물을 길으러 나올 수밖에 없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여인에게 다가가셨고, 생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돌아와 음식을 권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 4:35). 농사 절기로는 아직 넉 달이 남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이미 곡식이 익어 흰 들판이 보였습니다. 왜입니까? 예수님 자신이 씨를 뿌리시고,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저 그분이 이루신 것을 거두어들일 뿐입니다. 이것이 복음 전파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은 것을 거두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씨앗이 열매를 맺을지, 언제 맺을지는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그저 심고 물을 줄 뿐입니다.
몇 해 전 어느 교회 주일학교 교사회 시간이었습니다. 중고등부 아이들은 무엇을 해도 시큰둥하고, 유년부 아이들은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집에서 왕자와 공주로만 대접받아온 아이들이라 하나같이 자기중심적입니다. 이런 아이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교사들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가 원하는 시점에 우리가 원하는 열매가 맺히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씨를 뿌린 사람이 결과를 통제하려 들면 조급해지고 지칩니다. 하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아는 교사는 다릅니다. 그는 오늘 씨를 뿌리고 집에 돌아가 잠을 잡니다. 내일 또 일어나 일상을 삽니다. 그 자고 깨는 반복 속에서, 아이의 마음 밭에 심긴 말씀이 언제 싹틀지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6~8).
예수님은 이어서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31~32).이 비유를 사람들은 종종 오해합니다. "우리도 열심히 하면 저 겨자씨처럼 거대해질 수 있다"는 식의 성공 신화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핵심은 크기의 반전이 아니라, 시작의 미약함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리석고 미련해 보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이 왕이라니, 그보다 더 초라한 시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얼마 전 기독신문에 실린 만평 한 장이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목사 가운을 입은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검은 가운 뒤로 붉은 십자가가 똑같이 그려져 있는데, 한쪽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 있고 다른 한쪽에는 겨우 세 사람뿐입니다. 사람이 많은 쪽은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 믿으면 부자 되고 성공합니다." 세 사람뿐인 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같은 십자가를 걸치고도 전혀 다른 복음을 전하는 두 사람, 우리는 어느 쪽 목소리에 더 마음이 끌립니까? 세상의 힘과 숫자로 하나님의 나라를 증명하려는 유혹은 오늘도 여전히 강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십자가처럼, 세상 눈에는 보잘것없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따로 계실 때 제자들에게 해석해 주셨습니다(막 4:33~34). 왜 굳이 비유로 감추셨을까요? 들을 귀 있는 자만 듣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말 못 하는 우상, 곧 이 세상의 탐심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녔습니다. 그 상태로는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해도 자기중심적인 나라를 상상할 뿐입니다. 십자가에서 저주받아 죽은 사람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은, 성령이 붙들어 이끄시지 않고는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는 그 이끄심을 "강권하심"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각주에는 이 단어가 "이끄신다"는 뜻이라 설명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 사랑에 끌려간 것이 아니라, 이끌리어 간 것입니다. 찬송가 150장 2절 가사가 이 마음을 정확히 담아냅니다. "멸시 천대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 스스로는 결코 끌릴 수 없는 그 초라한 십자가에, 성령이 강권하여 이끄셔야 비로소 마음이 끌립니다.
이사야 27장은 이 진리를 아름다운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 5장의 포도원 노래에서는 좋은 열매를 기대했으나 들포도만 맺혀 심판받는 포도원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27장의 포도원지기는 분노하지 않습니다. 이미 포도나무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밤낮 지키시며 모든 대적을 물리치시고, 결국 그 결실로 온 지면을 채우십니다.
우리가 자고 깨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이 포도원지기 되시는 하나님이야말로 마가복음 4장의 씨 뿌리는 비유의 진짜 주인공이십니다. 씨를 뿌리는 것도, 밤낮 지키는 것도, 결실을 맺게 하시는 것도 모두 그분의 몫입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의 백성이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조급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내가 당기거나 밀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그저 뿌리고, 자고, 깨고, 또 뿌립니다. 열매가 언제 맺힐지, 얼마나 클지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바울사도가 다메섹에서 만난 빛,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만난 생수, 우리 각자가 살면서 만난 그 강권하시는 사랑, 이 모든 것이 한 가지를 증언합니다. 우리는 자라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라남을 지켜보며 감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 참여된 자들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묵묵히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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