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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마가복음

마가복음 - 등불을 가져오는 이유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1.

마가복음 4장 21~25절

2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정전이 된 밤을 상상해 보십시오. 온 동네가 캄캄해지고, 누군가 서랍 속에서 손전등을 찾아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손전등을 켜서는 곧바로 이불 속에 밀어 넣고, 그 위에 다시 옷장을 덮어 놓는다면 어떨까요?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은 고개를 갸웃할 것입니다. 불을 켰다면 그것을 밝혀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지, 켜놓고 감추어 버릴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무리에게 들려주신 말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등불은 어두운 곳을 밝히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당연한 말씀 뒤에 심상치 않은 문장을 덧붙이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평범한 비유 뒤에 이런 경고가 붙는다는 것은, 이 등불이 단순한 등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전체를 관통하며 이 등불의 정체를 따라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출애굽기의 광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성막에는 창문이 없었습니다. 사방이 휘장으로 둘러싸인 그 공간은 대낮에도 칠흑같이 어두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금으로 등잔대를 만들라 명하셨고, 그 등잔대는 일곱 개의 가지로 뻗어 일곱 개의 불꽃을 늘 밝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창 없는 방 안에서 그 등불이 꺼지는 순간, 그 공간은 곧바로 완전한 어둠이 됩니다. 다시 말해 그 등불은 없어도 그만인 장식이 아니라, 그 공간의 존재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생명줄이었습니다.

이후 성경은 이 등불의 이미지를 다윗 왕조와 연결시킵니다. 솔로몬이 죽고 나라가 둘로 갈라질 위기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 열 지파가 여로보암에게 넘어가는 그 혼란 속에서도, 다윗 가문에는 단 하나의 지파가 남습니다. 그 이유는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에게 등불을 주시겠다는 그 언약은, 결국 다윗의 왕위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메시아에게로 흘러가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은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오랜 세월 유대인들이 기다려 온 그 등불이 마침내 도착했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등불이 왔을 때, 아무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소포를 기다리던 사람이, 정작 문 앞에 도착한 상자를 보고는 "이건 내가 주문한 게 아니다"라며 돌려보내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그들이 상상해 온 등불은 화려한 왕의 등극, 로마를 무너뜨릴 군사적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온 등불은 마구간에서 태어나 목수의 아들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기대와 다른 모습이었기에, 그들은 자기 앞에 켜진 빛을 보고도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어긋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며 그 빛을 가리켰지만, 요한 자신도 스스로는 빛이 아니라 그 빛을 증언하러 온 사람일 뿐이라고 밝힙니다. 예수님은 후에 요한을 가리켜 "켜서 비추는 등불"이라 부르십니다. 자체 발광은 아니지만, 진짜 빛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보인 등불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손가락을 따라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마치 캄캄한 밤길에서 누군가 "저기 불빛이 있다"고 외쳐도, 정작 앞을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쳐다보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명확히 짚으십니다. "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성경을 그렇게 열심히 읽고 외우던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그 말씀이 가리키는 분을 알아볼 눈이 그들 안에는 없었습니다. 등불을 기다리며 평생을 살았지만, 등불이 켜지는 순간 오히려 눈을 가린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의 후반부, "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는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캄캄한 방에 불이 켜지면 두 종류의 반응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눈이 부셔도 그 빛을 향해 눈을 뜨고, 방 안에 흩어진 먼지와 얼룩을 비로소 발견하며 청소를 시작합니다. 빛을 받아들일수록 그는 더 많은 것을 보게 되고, 더 많은 빛을 원하게 됩니다. 반면 다른 사람은 불빛이 거슬려서 눈을 질끈 감아버립니다. 그는 방 안에 무엇이 있는지 끝내 보지 못한 채, 자신이 무언가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착각마저 잃어버리고 맙니다.

에베소서는 이 원리를 성도의 삶에 적용합니다. "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등불이 한 사람의 삶 속에 켜지는 순간, 그 사람은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어둠을 비로소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평소에는 깨끗해 보이던 방이, 강한 조명 아래에서는 먼지투성이였음이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오히려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로 고백하게 되는 성도들의 역설은 여기서 비롯됩니다. 빛이 강할수록, 감추어졌던 것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 등불을 또 다른 방식으로 묘사합니다. "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캄캄한 산길을 걷는 나그네에게 등불은 목적지 전체를 보여주지는 못해도, 다음 한 걸음을 내디딜 만큼의 빛은 비추어 줍니다. 성도의 삶이란 바로 그런 여정입니다. 완전한 대낮이 오기 전까지, 말씀이라는 등불에 의지해 한 걸음씩 걸어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책은 그 여정의 끝을 보여줍니다. "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더 이상 등불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등불 되신 분을 직접 마주하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걷던 밤길이 끝나고, 마침내 해가 떠오르는 순간과 같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등불은 이미 켜졌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비추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 빛을 알아볼 눈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빛을 향해 눈을 뜨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빛이 주어지고, 눈을 감아버리는 사람은 있던 것마저 잃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등불 앞에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그 빛을 향해 눈을 뜨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