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마가복음 3:13~19)
시몬이라는 이름의 어부가 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 그물을 던지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학식도 없고, 말도 거칠고, 성격도 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너는 반석이다"라고 부르셨습니다. 게바, 베드로는 흔들리는 갈대 같은 사람에게 붙여진 이름이 '반석'이라니,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이름입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도무지 자격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과분한 이름이 주어지는 순간 말입니다. 한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자녀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던 시절, 그 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는 나에게 최고의 아빠야." 아버지는 그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 한마디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자격이 있어서 주어지는 이름이 아니라, 사랑이 부르는 이름이 사람을 만들어갑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그는 반석 같은 사람이어서 반석이라 불린 것이 아니라, 반석이라 불렸기에 훗날 반석이 되어간 사람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했던 그 사람이, 훗날 로마의 박해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교회의 기둥이 됩니다.
마가복음 3장은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열두 제자를 세우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무리를 떠나는 일입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요구, 소란함으로부터 잠시 물러나는 시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산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고, 시온산에는 다윗과 솔로몬이 세운 성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르신 산은 그 어느 산도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선포된 말씀은 모세와 다윗의 권위를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산 위에서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조건을 보고 뽑으신 것이 아니라, 그저 원하셔서 부르신 것입니다. 이력서를 보고 채용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먼저 선택한 것입니다.
왜 하필 열두 명이었을까요?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이루어진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 열두 지파가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전부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지만 그들은 그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는 인간적인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십삼 년 동안 침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에야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나이에 이삭이 태어납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아브라함이 상속자가 된 것은 율법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의로 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이루어내서 얻은 자격이 아니라,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주어진 은혜였습니다.
오랫동안 아이가 없어 마음고생하던 부부가 있었는데, 온갖 방법을 다 써도 되지 않던 일이 정작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긴 순간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부부는 아이의 이름을 '기다림의 열매'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계획이 끝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된다는 것, 이것이 이삭의 이야기이고, 열두 지파의 이야기이며,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세우신 것은 바로 이 오래된 이야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들어가시는 그 방식을 다시 보여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열두 명의 명단 마지막에는 예수를 판 자,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처음 이름이 불린 베드로 역시 십자가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완벽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가 배신에 가까운 내부자의 실수로 무너질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를 통해 회사는 오히려 더 견고한 시스템을 만들게 되었고, 몇 년 후 그 사건은 회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무너뜨리려던 일이 오히려 세우는 일이 된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도 그러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팔러 나간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은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배신의 순간이 곧 십자가로 나아가는 순간이었고, 그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실패나 배신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통과하여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첫 번째 목적은 놀랍게도 '전도'도 '능력'도 아니었습니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가 가장 먼저입니다. 사역보다 동행이 먼저였습니다. 한 젊은 사역자가 처음 목회를 시작했을 때, 선배 목사님께 이런 조언을 들었다고 합니다. "설교를 잘하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놓치지 말게. 우물이 마르면 아무리 두레박질을 해도 물이 올라오지 않네." 능력과 은사는 그 동행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 동행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전도 방법론은 숫자와 효율을 앞세웁니다. 어떤 방법으로 교회가 얼마나 성장했다는 광고가 넘쳐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그 나라를 맛보고 누린 사람의 전도는 전혀 다른 결을 지닙니다.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흘러넘침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권능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굿판이나 영화 속 구마 장면처럼 생각한다면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회심 전 우리의 상태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표현합니다. 세상이 인정하고 칭찬하는 삶을 살아도, 복음을 모르는 삶은 여전히 그 권세 아래 갇혀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성공했지만, 정작 본인은 매일 밤 불안과 공허함에 시달렸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였지만 속으로는 성공이라는 우상, 비교라는 사슬에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후, "이제야 진짜 자유를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입니다. 세상의 가치관, 견고한 진, 우리를 사로잡던 생각의 틀에서 사람을 건져내어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축사입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지어졌듯, 예수님의 옆구리가 십자가에서 찔리심으로 교회가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결국 열두 제자를 부르신 이야기는 자격 없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오래된 부르심의 연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갈릴리의 어부와 세리들에게 이어진 그 부르심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합니다.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 그분의 원하심으로, 우리의 완전함이 아니라 그분의 신실하심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로마서 4: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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