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 말씀 묵상/마가복음

마가복음 - 안식일의 주인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24.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마가복음 2:23~28)

어느 해 가을, 한 젊은 신학생이 지도 교수를 찾아갔습니다. 오랜 시간 성경을 연구하고 경건의 훈련을 쌓았지만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일이면 누구보다 일찍 예배당에 나왔고, 기도 시간을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으며, 읽지 않은 신학서가 없을 만큼 부지런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에는 늘 피로가 깔려 있었습니다. 교수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
자네, 안식을 알고 있는가?" 신학생은 잠시 멈칫했습니다. "안식일은 지키고 있습니다." 교수가 다시 말했습니다. "나는 안식일을 물은 것이 아니라 안식을 물었네." 이 짧은 대화가 오늘 마가복음 2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품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걷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그들은 손을 뻗어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신명기는 이웃의 밭에서 손으로 이삭을 따 먹는 것을 허락합니다. 평일이라면 아무 문제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눈이 번뜩였습니다. "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그들의 눈에 제자들의 행동은 명백한 율법 위반이었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39가지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씨 뿌리기, 추수하기, 곡식 단 묶기, 타작하기, 체로 치기……. 이 목록에 따르면 제자들은 한 번에 여러 조항을 어긴 것입니다. 이삭을 꺾는 것은 추수이고, 손바닥으로 비비는 것은 타작이며, 껍질을 날리는 것은 키질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지키던 안식일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모든 행동을 규정하고 감시하는 것이 그들이 알던 '거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반박 대신 이야기 하나를 꺼내셨습니다. "
다윗이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사울 왕에게 쫓기던 다윗이 놉 땅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간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굶주렸습니다.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구했지만 제사장 손에 있는 것은 진설병뿐이었습니다. 진설병은 매 안식일마다 열두 덩이를 새로 만들어 성소 상 위에 올리고, 물려낸 것은 오직 제사장만 먹도록 정해진 빵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히멜렉은 그 빵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율법을 어긴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사건에서 아히멜렉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 사건을 근거로 드셨습니다. 아히멜렉이 안 것은 하나 였습니다. 법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것, 아니 더 정확히는, 율법의 정신이 곧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훗날 아히멜렉은 사울에 의해 가족과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빵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 죽음을 부끄럽게 여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율법의 껍데기가 아니라 율법의 속살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 이 한 문장이 바리새인들의 세계를 뒤집었습니다. 그들에게 사람은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이라는 제도가 먼저이고, 사람은 그 제도를 섬기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배가 고파도 참아야 하고, 아파도 고쳐서는 안 되며, 생명이 위태로워도 법을 먼저 따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순서를 바꾸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섬기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아마도 우리 안에도 바리새인의 논리가 살아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우리 역시 무의식 중에 신앙을 하나의 규율 목록으로 만들고, 그것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려 합니다. 새벽기도 출석 횟수, 성경 읽기 분량, 봉사 시간……. 그것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안식의 조건이 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39가지 조항을 만들어 스스로를 가두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인간의 실상을 날카롭게 묘사합니다. "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은 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안식 안에서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가 그 안식 밖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사람이 창조된 것이 엿새째 날이라고 말합니다. 즉 사람이 태어난 다음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사람은 일하는 것으로 존재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쉬는 것으로 존재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 속에 거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 사건 이후 인간은 안식 밖에서 삽니다. 스스로 웅덩이를 파고, 그 터진 웅덩이에 끊임없이 물을 채우려 합니다. 아무리 채워도 바닥으로 새어 나가는 물처럼, 우리의 수고는 쌓이지 않습니다. 이 피로가 우리 모두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선언이 복음입니다. "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의 주인이 오셨습니다. 안식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오셨습니다. 규율을 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안식 자체를 들고 오셨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안식에 들어가는 일이 창조 때부터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안식은 우리가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서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분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안식일 계명이 '
창조'를 기억하게 한다면, 신명기의 안식일 계명은 '구원'을 기억하게 합니다. 창조도 선물이었고, 구원도 선물이었습니다. 우리의 노동의 대가가 아니었습니다. 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안식일의 완성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 쉬신 것처럼, 예수님은 구원의 일을 다 이루시고 그 안식을 우리에게 여셨습니다. 골로새서는 절기와 초하루와 안식일이 다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있어야 생깁니다. 구약의 안식일이라는 그림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향해 드리워진 것이었습니다. 그 실체를 붙잡은 사람은 더 이상 그림자를 붙잡고 씨름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수에게 "
안식을 아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신학생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사실 모르는 것 같습니다." 교수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가 진짜 공부일세. 안식을 주시는 분을 아는 것, 그것이 신학의 출발이니까."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안식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안식은 조항을 이행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이들에게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 2:2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