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가복음 2:10)
지붕에서 사람이 내려왔습니다. 그날 가버나움의 어느 집 안은 숨이 막힐 듯 빽빽했습니다. 문 앞에는 사람들이 겹겹이 들어서 있었고, 안마당까지 인파가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계신다는 소문 하나가 온 동네를 들썩이게 만든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무언가를 기대하며 몰려들었습니다. 병 고침을 바라는 자들, 기적을 구경하러 온 자들, 그리고 이 낯선 선생을 시험하려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천장에서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먼지가 떨어지고, 지붕의 흙이 조각조각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구멍이 뚫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한 사람이 침상에 실린 채 천천히 내려왔습니다. 중풍병자였습니다. 그를 들고 온 네 명의 사람들이 지붕 위에서 줄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 하나가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네 사람은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가고자 했지만 문 앞에서 막혔습니다. 인파를 헤치고 들어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가면 된다는 것, 그 믿음이 결국 남의 집 지붕을 뜯어내는 일까지 하게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손해를 배상해야 할 일이 생기더라도, 그건 그때 생각하면 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자기 친구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예수님의 반응이 뜻밖이었습니다. 모두가 기다린 말은 "나았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병자는 몸을 고쳐달라고 왔지, 죄 사함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왜 병 고침이 아니라 죄 사함을 먼저 선언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상황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짚으셨습니다. 병은 그 사람에게 나타난 증상이지만, 죄는 그 증상을 만들어낸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이 병들고, 늙고, 결국 죽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결과입니다. 아담 이후로 인류는 그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분리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병은 그 분리의 표징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볼 때 증상만 치료하는 것과 병의 근원을 치료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두통이 심한 환자에게 진통제만 계속 처방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것은 좋은 치료가 아닙니다. 두통의 원인이 뇌종양이라면, 진통제는 고통을 잠시 줄여줄 뿐이고 진짜 문제는 오히려 더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통제를 처방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죄라는 종양을 직접 건드리셨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서기관들이 속으로 격분했습니다. '신성모독이다. 죄를 사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신데, 이 사람이 감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그들의 반응은 신학적으로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구약 성경 어디를 봐도 죄를 사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만의 권한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 130:3~4).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만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은 서기관들이 옳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놓친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들 앞에 서 계신 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이것은 단순한 수사학적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죄 사함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죄를 사했는지 사하지 않았는지를 인간이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다릅니다. 일어나면 일어난 것이고, 일어나지 못하면 못한 것입니다. 이 말은 즉각적으로 검증이 됩니다. 그러니 어쩌면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이 더 하기 쉬운 말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 검증 가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자기를 데려온 침상을 손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걸어나갔습니다. 방금 전까지 네 사람이 들고 다녀야 했던 그 사람이, 이제 자기 침상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이 사건은 기적 그 이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것은 단순한 치유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인자, 곧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그분께 하나님의 권세,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을 읽다 보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어떤 상태로 전락하는지를 바울은 냉정하게 열거했습니다. 불의, 탐욕, 시기, 살인, 분쟁, 교만, 무자비함… 이 목록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저 목록의 어느 항목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이후 스스로를 살리려 합니다. 그런데 나도 나를 살리려 하고, 옆 사람도 자신을 살리려 합니다. 거기서 경쟁이 시작되고, 시기가 싹트고, 분쟁이 생깁니다. 철학자 홉스는 인간의 자연 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진단은 날카로웠지만, 그 처방은 국가 권력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가도, 법도, 도덕도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죄의 뿌리는 제도로 뽑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두 가지 악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 그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 그런데 그 웅덩이는 물이 고이지 않는 터진 웅덩이라고 했습니다(렘 2:13).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로는 그 어떤 노력도 결국 새어나갑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합니까? 예수님은 그날 가버나움에서 그 답을 보여주셨습니다. 죄 사함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시급한 문제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코리 텐 붐은 전쟁이 끝난 후 독일 전역을 다니며 용서와 화해를 전파했습니다. 어느 날 집회가 끝난 뒤,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 남자는 과거 수용소의 간수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순간, 코리 텐 붐은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을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 손을 잡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하십시오." 그 순간 그녀의 손이 저절로 내밀어졌고,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따뜻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용서는 감정이 아닙니다. 용서는 의지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그 나머지를 채우십니다." 죄 사함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권세를 가진 분이 선언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권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8~19)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죄 사함의 소식을 듣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예수님의 권세가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의 말씀이 막힐 이유가 없습니다. 2천 년이 지나도록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것은 그 권세 때문입니다.
그날 가버나움의 지붕에서 내려온 한 사람처럼, 우리도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지붕을 뜯어내는 수고도 감수하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분 앞에 나아가는 자에게 가장 근본적인 선언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오래 누워 있던 자들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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