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마가복음 1:40~45)
어느 해 추석 전날, 전라남도 고흥 앞바다에 있는 소록도에서 한 통의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발신인은 마리안느 스퇴거와 마가렛 피사렉입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두 간호사였습니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섬을 떠나면서 짧은 편지 한 장만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이제 너무 늙어서 여러분에게 짐이 될 것 같습니다. 조용히 떠나겠습니다." 그들은 40년을 소록도에서 살았습니다. 한센인들의 상처를 씻기고, 무너진 손을 붙잡아 주고,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보상도 없이, 아무 기념행사도 없이, 그냥 사라졌습니다. 그 편지를 읽은 한센인들은 오래 울었다고 합니다. 누군가 내밀었던 손, 맞잡아도 괜찮다는 뜻으로 먼저 뻗어온 손, 그 손이 한 사람의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마가복음 1장에는 이름도 없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나병환자였습니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나병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레위기 13장은 나병환자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향해 외쳐야 했습니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가장 잔인한 선언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저주해야 했습니다. 병이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하다고 레위기는 못 박습니다. 하루도, 한 순간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진영 밖에서 홀로 살아야 했습니다. 가족과의 포옹도, 회당에서의 예배도, 시장에서의 흥정도, 이웃과의 저녁 식사도, 모두 금지된 것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으되 이미 죽은 삶이었습니다.
나병은 또한 천형이라 불렸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에게 내려지는 징벌입니다. 그러니 나병환자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일 이런 물음 앞에 서야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에게 저주받은 것인가? 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인간인가?" 그 사람이 예수께 나아옵니다. 어떻게 왔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군중을 헤치고 왔는지, 새벽 어스름에 몰래 접근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는 것은 압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도 압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한 마디는 신학적으로 매우 정교한 고백입니다. 그는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능력에 대한 신뢰입니다. 동시에 "원하시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속에는 자신의 원함을 주님의 뜻 앞에 내려놓는 겸손이 담겨 있습니다. 유대인의 전승에 따르면 나병은 오직 하나님만이 고치실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알고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쳐주셔야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고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요청을 철저히 주님의 원하심에 맡겼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자신의 절박함보다 상대방의 뜻을 더 높이는 것, 그리고 그 뜻이 선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미셨습니다. 이 행위의 무게를 우리는 쉽게 흘려 지나갑니다.
그러나 당시 맥락에서 이것은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나병환자와 접촉하는 자는 율법에 따라 부정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치료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의 부정함을 자신이 대신 짊어지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 말과 함께 나병이 떠나갔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창세기의 한 장면이 겹쳐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던 그 순간, 손이 닿고, 말씀이 임하고,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만지시고 말씀하심으로, 그를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깨끗함을 받은 그에게 엄중히 명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입증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상하게도 그가 제사장에게 갔는지, 모세의 규례를 다 행했는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만 기록합니다.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였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의도적인 침묵입니다. 레위기 14장을 보면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은 후에 행해야 하는 정결 의식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새 두 마리, 백향목, 홍색 실, 우슬초,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에서 잡아 피를 취하고, 그 피를 다른 새와 나병환자에게 일곱 번 뿌립니다. 그 살아 있는 새는 들판으로 날려 보냅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옷을 빨고 몸의 모든 털을 밀고 물로 씻습니다. 7일을 진영 밖에 있다가 8일째에 다시 제물을 드립니다. 이때 제사장이 그 피를 나병환자의 오른쪽 귓불, 오른 엄지발가락, 오른 엄지손가락에 바릅니다.
그런데 이 규례를 보면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듭니다. 출애굽기 29장의 제사장 위임식입니다. 제사장이 직무를 맡을 때, 그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 엄지손가락과 오른 엄지발가락에 피를 바르고 기름을 바릅니다. 정확히 같은 자리입니다. 나병환자의 정결 의식이 제사장의 임직 의식과 겹쳐집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나병환자의 모든 부정함이 제사장에게 전가되어, 제사장의 대리적 희생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를 바르는 제사장은 결국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히브리서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장차 올 것의 그림자입니다. 실체는 따로 있습니다.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예수님이 나병환자에게 하신 이 말씀의 참 의미는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가리키는 분이 누구인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18장에서 모세는 예언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스데반은 순교 직전의 설교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며 그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 전체가 자신에 관한 것임을 설명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었습니다. 그 손가락을 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분을 보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은 예수 그리스도는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증언하는 분이 성령이시라고 말합니다. 물과 피와 성령, 이 셋이 합하여 하나라고 말입니다. 레위기의 나병 정결 규례가 바로 이것입니다. 물로 씻고, 피를 바르고, 기름을 바릅니다. 기름은 구약에서 성령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실제로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요한복음은 로마 병사가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나왔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니 모세가 명한 정결 의식의 마지막 실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분의 물과 피와 성령으로 우리는 깨끗하게 됩니다.
레위기 13장에는 흥미로운 규정이 하나 있습니다. 나병이 부분적으로 있으면 부정하지만, 온몸이 나병으로 뒤덮였을 때에는 오히려 정하다고 선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레 13:13). 이것은 역설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논리와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자신 안에 아직 의로운 것이 조금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그만큼 덜 붙듭니다.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인데, 예수님도 좀 필요하다"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부분적으로만 의지합니다. 그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이 나병임을 안 사람, 자신 안에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안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다른 가능성이 없게 됩니다.
그것이 완전한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소록도 한센인들의 손을 잡았을 때, 그 손을 잡힌 사람들은 무언가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깨끗한 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손을 붙들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렸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하시면, 하실 수 있나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 손이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뻗어 있습니다.
'신약 말씀 묵상 > 마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마가복음 -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0) | 2026.05.15 |
|---|---|
| 마가복음 - 부르심과 목적, 그물을 버려두고 (1) | 2026.05.09 |
| 마가복음 - 때가 찼다, 방향을 바꾸는 삶 (0) | 2026.04.30 |
| 마가복음 - 광야로 가는 길 (2) | 2026.04.24 |
| 마가복음 - 하늘이 갈라지다, 예수님의 세례와 새로운 세상의 열림 (0) | 2026.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