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마가복음 1:12~13)
어떤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절을 보낼 때, 그는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지금 광야를 걷고 있습니다." 그 말 속에는 외로움과 막막함,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다림의 무게가 담겨 있습니다. 광야는 아름다운 곳이 아닙니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고, 사람의 온기도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바로 그 광야로 자기 백성을 이끌어 가신다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조차 광야로 몰아내셨다고 합니다. 대체 왜 그러신 것입니까?
야곱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늘날로 치면 사기꾼이었습니다. 형 에서를 배고픈 틈을 타 팥죽 한 그릇으로 속여 장자권을 빼앗았고, 늙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교묘히 속여 장자의 축복까지 가로챘습니다. 결국 분노한 형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은 밤을 틈타 도망을 칩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재물도, 종도, 친구도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저지른 일들의 무게만을 지고 광야를 걷습니다.
해가 지자 더 이상 걸을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아무 데나 주저앉아 돌 하나를 베개 삼아 눕습니다. 차갑고 딱딱한 돌베개 위에서 눈을 감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야곱은 꿈을 꿉니다. 땅에서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 그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사닥다리 꼭대기에 하나님께서 서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야곱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기도한 것도, 회개한 것도, 제물을 드린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방금 전까지 아버지와 형을 속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도망자에게, 그것도 광야의 차가운 돌베개 위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신 그 위대한 언약을 다시 하십니다. 잠에서 깬 야곱은 두려워하며 말합니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광야에서 하늘이 열렸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가장 위대한 계시가 임했습니다.
그로부터 수백 년 후, 예레미야라는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성전은 불타고, 왕은 두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참혹한 현장 앞에서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이 말씀을 들으면 고개가 갸웃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잘 따랐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78편을 보면 그들은 "거듭거듭" 하나님을 시험하고 배반했습니다. 물이 없다고 원망했고, 고기가 없다고 불평했고, 심지어 하나님의 기적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돌아서면 곧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민수기는 그들이 열 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 광야 시절을 신혼 때의 사랑으로 기억하신다고 하십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마음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 없이는 살 수 없었습니다. 사막에서 방향을 잃으면 죽습니다. 물이 없으면 죽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죽지 않으려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마지못한 따름조차, 하나님은 신혼의 사랑으로 기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어머니와 같습니다. 사춘기 아들이 반항하고 집을 나가려 해도, 아직 어려서 결국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그 시절을, 어머니는 아들이 자신과 함께했던 가장 따뜻한 기억으로 간직합니다. 아들의 반항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잠들었던 그 시절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러합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제 공생애의 영광스러운 출발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십니다. 마가복음은 그 단어를 부드럽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몰아내셨다"는 말입니다. 마치 등을 떠밀듯, 급하게 내모셨다는 뜻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레위기 속죄일에는 염소 두 마리를 골랐습니다. 한 마리는 죽여 그 피로 속죄소를 정결하게 했고, 다른 한 마리는 살려서 대제사장이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그 머리에 얹은 다음 광야로 내보냈습니다. 그 염소가 광야로 사라지면 이스라엘의 죄도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아사셀'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속죄 염소, 영어로는 '스케이프고트'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광야로 몰려 가신 것은 바로 이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실패한 그 자리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은 모든 죄를 지고서, 예수님이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사탄의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을 때, 마가는 짧지만 깊은 장면을 기록합니다.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사야 11장은 메시아가 오실 때의 세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치는 세상입니다. 에덴동산이 회복되는 그림입니다. 아담이 실패한 자리에서 사탄에게 패배한 후 짐승들과의 관계가 무너졌고, 인간은 짐승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심으로 그 모든 것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들짐승들이 예수님과 함께 평화롭게 거했다는 것은, 새로운 에덴이 열렸다는 선언입니다.
2018년 어느 여름, 한 목사가 중고등부 학생들과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목이 터져라 복음을 전했지만, 아이들의 눈은 멀리 있었습니다. 마지못해 앉아 있고, 마지못해 들어주는 척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사역의 광야였습니다. 그때 이사야 7장의 말씀이 위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믿음이 없는 아하스 왕에게도 하나님은 친히 임마누엘의 징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 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내 열심이 복음을 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자기 백성을 광야로 이끄십니다. 사업이 무너지는 광야, 관계가 끊어지는 광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광야, 오래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광야로 몰아내십니다. 그곳은 외롭고 두렵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광야에서 우리는 배웁니다. 신명기 8장의 말씀대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배웁니다.
광야에서 야곱이 하늘의 문을 보았듯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듯이, 광야에서 예수님이 사탄을 이기셨듯이, 우리도 광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광야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예수님이 계십니다.우리가 원해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그 광야로 이끄실 때, 그것은 버리심이 아니라 데려가심입니다. 그 광야 끝에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 너머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로 몰려갈 때에,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 광야는 결코 끝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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