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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마가복음

마가복음 -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의 의미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22.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마가복음 1:6~8)

강물 속에 몸을 담갔다가 나온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은 물에서 나오기 전과 겉모습은 같습니다. 그런데 무언가가 달라졌습니다. 물속에 잠긴 그 짧은 순간, 그는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그토록 선명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습니다. 물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단순히 젖은 몸으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가 끝났고, 무언가가 시작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을 때,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습니다. 세리도 왔고 군인도 왔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왔습니다. 요한은 그들을 요단강 물속에 푹 담갔습니다. 그런데 요한 자신은 이 물세례가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물에 담그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담그는 일은 자기 뒤에 오시는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톰 라이트는 이 구절을 이렇게 옮겼습니다.
"나는 너희를 물에 푹 담갔지만, 그 분은 너희를 성령으로 푹 담그실 것이다." 물에 푹 담근다는 표현이 생생합니다. 사람은 물속에서 살 수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 안에서 먹고 마시고 사고팔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것을 더 잘하기 위해 교회에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 건강하게, 더 성공적으로,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말입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바로 그 방향성을 물속에 장사지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방식, 자신이 기댄 의로움, 자신이 쌓아온 공로를 전부 물속에 처넣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기를 살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땅에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처참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데려오시겠다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겔 36:22). 회복의 이유가 이스라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이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회복의 방식이 이렇습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겔 36:25-27). 물로 씻고, 새 영을 주고, 돌 같은 마음을 살 같은 마음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세례입니다.

돌 같은 마음이란 어떤 마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떨어져도 튕겨 나가는 마음입니다. 씨앗이 돌 위에 떨어지면 뿌리를 내리지 못하듯이, 돌 같은 마음에는 복음이 심겨지지 않습니다. 그 마음은 단단하게 굳어 있습니다. 자기 의로움으로, 자기 확신으로, 자기 경험으로,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그 마음이 살 같이 부드러워집니다. 상처도 나고 아프기도 하지만, 씨앗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마음이 됩니다.

더 나아가 에스겔은 성령이 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합니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겔 36:31). 성령이 오시면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미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 운동이라고 불리는 많은 것들을 보십시오. 성령을 받으면 능력이 생기고 영웅이 된다고 합니다. 병이 낫고 사업이 번창하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합니다. 한 미국 학자가 한국의 성령 운동을 보고 샤머니즘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을 때, 그것이 정확한 진단이었는지 모릅니다. 성령을 자기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는 욕망, 그것은 에스겔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와 정반대 방향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미워하게 됩니다.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두 눈으로 목격한 선지자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겠다는 옛 언약의 방식이 얼마나 철저하게 실패했는지를 역사의 현장에서 보았습니다. 그 폐허 위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 31:31). 옛 언약은 돌판에 새긴 율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새 언약은 다릅니다.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렘 31:33). 마음 안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새겨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내부의 충동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찾을 때 누군가 시켜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배가 고프고 무서울 때 자연스럽게 엄마를 부릅니다. 새 언약의 백성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새 언약 안에서는 죄가 사해지고 다시 기억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렘 31:34). 에스겔이 말한 새 마음과 예레미야가 말한 새 언약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의 성취가 성령의 세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떠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근심했습니다. 메시아가 곁에 계셔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떠나신다니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오르신 다음에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이 순서여야 합니까? 왜 예수님이 먼저 가셔야 성령이 오실 수 있습니까? 십자가 없이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먼저이고, 성령의 내주하심이 그 다음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시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성령은 오셔서 우리가 그동안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죄임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의롭다고 여겼던 것이 실은 의가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이 책망입니다. 그것은 가혹한 정죄가 아닙니다. 눈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 번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예수 믿은 후에 오히려 더 힘들어졌어요. 믿기 전에는 제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믿고 나서는 제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얼마나 교만한지 자꾸 보이거든요." 그분은 그것이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이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의 죄악을 기억하고 스스로 밉게 보게 된다는 에스겔의 예언이 그 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오래 믿었는데도 자신이 대단히 의롭고 다른 사람들의 문제가 선명하게 보이는 사람은 한 번쯤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의 세례는 나를 자랑하게 하지 않고,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알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요 16:14~15). 자기 영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성령의 세례를 세례의 언어로 설명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 6:3). 세례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는 연합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빚을 받으러 온 채권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죽었습니다. 죽은 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죄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이미 그 요구를 다 치르고 죽은 것입니다. 죽었으니 더 이상 죄가 왕 노릇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니, 이제는 새 생명 안에서 삽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여기서 '여길지어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현실에서 우리의 옛 사람은 지금도 살아있는 것처럼 벌떡댑니다. 여전히 욕심이 나고 화가 나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었고 이미 살아났다는 것을 사실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특별한 체험이나 신비한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며, 지금 하늘에서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 안에서 자신의 옛 방식이 물속에 장사되었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 일을 하십니다. 단독으로 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들이 이루신 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하고 예수의 영이라고도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고(고전 12:3),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롬 8:15).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열매를 맺습니다. 가지가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붙어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나무에서 끊어진 가지는 말라 죽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포도나무에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접붙임을 받은 가지는 이제 포도나무의 수액으로 삽니다. 자신의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던 것의 내용입니다. 물로 세례를 받아 옛 방식이 장사되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것. 이 모든 일을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이루십니다. 그 중심에 십자가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