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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마가복음

마가복음 - 때가 찼다, 방향을 바꾸는 삶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30.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마가복음 1:14~15)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밤, 동독의 한 노인이 서쪽 거리로 걸어 나왔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가 알던 세계는 장벽 안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배운 가치관, 그 안에서 형성된 세계관, 그 안에서 옳다고 여긴 모든 것들이 그의 뼈 속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그는 서쪽 거리에 서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발걸음을 옮기는 일이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그 발걸음이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모든 것을 부정하는 행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선포하신 첫 마디는 바로 이 노인이 서 있던 그 자리를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15)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후, 성령께서 그분을 이끄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리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개인적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은 명시적으로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시니." 성령께서 광야로 이끄신 것처럼, 성령께서 갈릴리로 이끄신 것입니다.

왜 갈릴리입니까? 갈릴리는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가 정착한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이 수도가 되면서, 갈릴리는 점차 변방으로 밀려났습니다. 이방인들과 뒤섞여 사는 혼혈의 땅, 정통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는 지역입니다. 예루살렘의 랍비들은 그곳 사람들을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자들로 여겼습니다. 소위 '
중심부'의 사람들이 '주변부'를 바라보는 그 냉담한 시선이 갈릴리를 덮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수백 년 전에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이사야 9:2) 하나님의 복음은 화려한 중심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멸시받는 변방에서, 이방인과 뒤섞인 갈릴리에서, 흑암과 사망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그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었습니다. 인간이 설계하지 않은 방식으로, 인간이 기대하지 않은 장소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이 순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바울은 '때가 찼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흥미로운 비유를 사용합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어도, 아직 어릴 때는 종과 다를 바 없이 후견인과 청지기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후견인의 역할은 아이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아버지의 집을 바르게 상속받을 수 있도록 보호하고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정한 때가 되면, 후견인의 역할은 끝납니다. 아이는 이제 직접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삽니다.

바울은 이 율법이 바로 그 후견인이었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임시적인 교사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후견인이 목적이라고 착각했습니다. 후견인에게 충성하는 것 자체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마치 이런 상황입니다. 한 아버지가 오랫동안 집을 비우면서 아들에게 편지를 남겼습니다.
"이 집에서는 저녁 여섯 시에 문을 잠가라. 낯선 사람은 들이지 마라. 매주 월요일에는 집을 청소해라."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드디어 돌아왔습니다. 아들은 반가워하는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지금은 저녁 여섯 시가 넘었으니 문을 열어드릴 수 없습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편지를 지켰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놓쳤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바로 이 '때가 찼음'의 선포였습니다. 이제 후견인의 시대가 끝났습니다. 아버지께서 직접 아들을 통해 다스리시는 때가 왔습니다.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까? 바울은 그것을 '
세상의 초등학문(스토이헤이아)'이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쉽게 말하면 세계관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빚어놓은 세계관 속에서 모든 것을 봅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생후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평생 율법 교육을 받으며 자란 사람의 내면에는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신이 뼈와 살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것을 날카롭게 표현했습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예레미야 13:23) 표범의 얼룩은 표범의 정체성입니다. 그것을 지우면 표범이 아닙니다. 세계관도 그렇습니다. 그 세계관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해체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회개는 인간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한 사람이 평생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살아왔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명문 대학, 안정된 직장, 번듯한 결혼, 그것이 '
올바른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모든 기준이 틀렸다고, 그 기준을 붙잡는 것이 오히려 진짜 삶을 놓치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는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전에 본능적으로 저항합니다. 왜냐하면 그 기준이 흔들리면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모든 삶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의 의를 버리라는 말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종교적 견해를 바꾸라는 요청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온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에서 바울은 이것을 '
견고한 진'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과 생각들이 요새처럼 구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나쁜 생각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시대에 가장 선하고 옳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그 진의 재료가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견고한 진이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더욱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이해한 복음의 언어와 표현 방식을 절대화하여, 그것과 다르게 말하는 사람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으로 포장된 견고한 진입니다. 그들이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이론입니다.

어느 신학교 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믿는 것이 정말로 성경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당신이 성경을 읽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것을 성경에서 찾은 것인지 어떻게 구별하겠는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인간 이성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관이라는 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으면서, 그 안경이 성경에서 나왔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령은 오늘도 유효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그렇다면 이 불가능한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사도 베드로가 선포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그것이 회개입니다.

논리적 납득이 아닙니다. 지식적 동의가 아닙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는 경험입니다. "
어찌할꼬"라는 탄식, 그것이 성령이 일으키시는 진짜 회개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감정이나 결단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니,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성령이 임하시면 가장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모든 죄의 뿌리였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실패를 회개하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지 않은 것,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살아온 것, 그것이 죄임을 깨닫는 것이 진짜 회개입니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어떤 이는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예수님을 믿었는데."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은 과거에 한번 응답하면 완료되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현재형 명령입니다.

화석이 된 믿음이 있습니다. 한때는 살아있었으나, 굳어버린 믿음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있고, 은혜를 말하지만, 더 이상 "
어찌할꼬"를 경험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은 점점 자신의 이론이 되고, 자신의 진영이 되고, 결국 또 하나의 견고한 진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단순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지금도, 오늘도 유효한 부르심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1:16) 그 능력은 과거형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오늘도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린도전서 1:23~24)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그날 밤, 그 노인은 결국 발걸음을 뗐습니다. 떨리는 발걸음이었지만, 그것이 자유를 향한 첫 걸음이었습니다. 때가 찼습니다.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집으로 걸어 들어갈 때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