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마가복음 1:16~20)
갈릴리 호숫가 이른 아침, 바람이 물 위를 스치고 있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그날도 어김없이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각오도, 내면의 결단도 없었습니다. 어제도 그랬고, 그 아버지도 그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랬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것이 그들의 삶이었고,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찢어진 그물을 꿰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품꾼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평범하고 분주한 아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누군가 지나가다 그들을 불렀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리고 그들은 곧, 즉각적으로 그물을 버려두었습니다. 배를 버려두었습니다. 아버지와 품꾼들을 버려두었습니다. 마가는 그 사이에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망설임도, 계산도, 눈물의 작별 인사도 없습니다. 다른 복음서가 전하는 사전 만남의 이야기들을 마가는 모두 생략합니다. 그는 오직 부르심, 그리고 즉각적인 응답 두 가지만 기록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이 그들을 움직인 것일까요?
1993년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한 작은 항구 마을에 허리케인이 상륙했습니다. 기상청의 경보가 울렸고, 주민들은 피난 명령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짐을 챙겨 내륙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한 노인 어부가 끝까지 자리를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내 배가 여기 있소." 배는 그의 삶이었습니다. 삼십 년을 함께한 배를 두고 떠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이웃의 강제적인 설득에 떠밀려 간신히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폭풍이 지나간 뒤, 항구로 돌아온 그는 산산조각 난 배의 잔해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시몬과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배와 그물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생계가 아니라 정체성이었습니다. 자기 배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 시대에 중산층의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쉬운 결단이 아닙니다. 아니, 인간의 결단으로는 그 자리에서 곧 떠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움직인 것일까요?
요한복음 5장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 곁에 38년을 누워 있던 병자입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었지만, 그곳에는 자비도 안식도 없었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유대인들의 도시 한복판에서, 안식일마다 병자들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자비의 집에 자비가 없었고, 안식일에 안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순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물으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믿음도 없었고, 간절한 호소도 없었습니다. 그저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선언되었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러자 38년 된 병자가 일어났습니다. 38년 동안 한 번도 걷지 못한 다리로, 그가 걸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순종이나 믿음의 결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 자체의 능력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던 것처럼,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38년의 어둠을 걷어내신 것입니다. 갈릴리 어부들이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간 것도 같은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인간의 결단을 촉구하는 초청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의 말씀이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심에 빛이 생겨난 것처럼, 나를 따라오라 하심에 그들이 따라간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시작된 사건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제자는 스승을 찾아가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부르심의 주도권은 처음부터 예수님께 있었습니다.
따라가는 길이 아름답기만 했다면, 이야기는 훨씬 단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함께 걸으면서 누가 더 높으냐를 다투었습니다. 서로 시기하고 자리를 탐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앞에서, 그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베드로는 저주하며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것이 부르심의 실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이 전하는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아셨습니다.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유다가 배신할 것을, 그들이 모두 도망칠 것을, 그럼에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미리 기도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라." 부르심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예수님은 부르신 자를 끝까지 붙드십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열두 제자 중 가장 먼저 부름 받은 어부들은, 마침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하루에 삼천 명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언변이나 전도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동일한 말씀의 능력이, 이제 그를 통해 흘러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낚는 어부'란 무엇입니까? 이것을 전도 기술로 이해하면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친근한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심판의 언어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이 유다를 포로로 잡아가는 것을 어부가 물고기를 낚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렘 16:16).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교만한 바로 왕을 갈고리로 아가미를 꿰어 끌어내겠다고 하셨습니다(겔 29:4). 아모스는 하나님을 버린 북 이스라엘이 갈고리에 꿰여 끌려갈 것이라고 했습니다(암 4:2). 실제로 앗수르 군인들은 포로들의 코를 갈고리로 꿰어 끌고 갔다고 합니다. 낚시와 그물은 침략과 포로와 심판의 이미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삼으신 것은, 이 세상이 곧 바다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악인을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에 비유했습니다(사 57:20). 유다서는 거짓 교사들을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라 했습니다(유 1:13). 이사야 27장은 바다에 있는 용,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이 심판의 날에 죽임을 당한다고 선언합니다. 교만, 요동, 수치, 용, 뱀,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이 세상의 본질입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낚시에 걸려 수면 위로 끌려 올라가는 순간은 물고기에게 재앙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평생 헤엄치던 세계에서 강제로 뽑혀나오는 경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입니다. 낚이지 않으면 그 바다와 함께 멸망합니다.
복음은 위로만 하는 소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먼저 이 세상이 멸망할 바다임을 선포하고, 그 바다에서 건져내는 구원을 선언합니다. 심판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심판의 무게를 알아야 은혜의 깊이를 압니다.
어느 이민 교회 성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고국을 떠나 새로운 땅에 정착하면서 처음에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했다고 합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서투르고, 음식도 낯설었습니다. 모든 것이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고국에 다시 가도 그곳이 예전의 고국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그곳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새로운 땅의 사람도 완전히 아니었습니다.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이 세상에 내 집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자리입니다. 복음의 낚시에 걸린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압니다.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에서 뽑혀나오는 낯섦을 압니다. 그러나 그 아픔이 도리어 다른 나라를 소망하게 만듭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은 선언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교만도, 요동도, 수치도, 리워야단도, 용도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진 곳입니다.
성도는 지금 이 요동하는 바다 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낚시에 걸려 그 바다 밖으로 끌려가는 중입니다. 그 끌려가는 아픔이 곧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끌려가는 목적지는, 바다가 없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갈릴리 어부들은 그날 아침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가는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신 분은 아셨습니다. 그들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을 위해 부르셨는지를 처음부터 아셨습니다. 부르심은 우리에게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부르심은 그분에게서 옵니다. 우리는 다만,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가면 됩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가복음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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