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마가복음 2:18~22)
어떤 결혼식장에 들어선 사람이 검은 상복을 입고 있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예의 바른 사람이라도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그 옷이 나쁜 옷이어서가 아닙니다. 장례식장에서라면 더없이 적절한 옷입니다. 문제는 자리입니다. 어떤 옷을 입는가는 지금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가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금식 논쟁에서 하신 말씀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금식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식은 본래 슬픔의 언어입니다. 밥을 먹지 않을 만큼 애통하다는 몸의 고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70년 동안 여러 날을 정하여 금식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뚫리던 날, 성전이 불타던 날, 지도자가 암살당하던 날, 그 기억을 몸으로 새기며 해마다 금식하였습니다. 나라를 잃은 자들의 눈물이 금식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스가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 슬픔의 날들이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로 바뀔 것이라고 하십니다(슥 8:19).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돌아오셔서 예루살렘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슬픔의 이유였던 하나님의 떠나심이 끝나고, 하나님의 오심이 시작되면, 금식이 잔치로 바뀌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우리는 금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표면적으로는 경건에 관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의 이면에는 자신들이 더 경건하다는 자부심이 깔려 있습니다.
사실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도 똑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금식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나님을 향한 열심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냉정했습니다.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종들에게 온갖 일을 시키고, 논쟁하고, 다투고 있지 않느냐고 하십니다(사 58:3~4). 금식이라는 형식은 있는데 그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사 58:6~7).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밥상에 앉으신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몸소 행하신 것입니다. 형식으로는 먹고 마셨지만, 그 내용은 결박된 자들을 풀어주는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선명합니다. 지금은 신랑이 와 있는 혼인 잔치입니다. 결혼식장에서 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랑이 곁에 있을 때 슬퍼하는 것은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스가랴가 예언한 그 날이 도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금식의 날들을 기쁨으로 바꾸겠다 하신 분이 지금 이 식탁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금식할 수 있겠습니까?
2020년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 어떤 가족이 3년 만에 해외에 나간 아들을 공항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날 저녁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었는데,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이 밥이 그냥 밥이 아니야. 다시 만난 밥이야." 함께 있다는 것이 밥상의 의미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그 식탁이 바로 그런 밥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개의 비유로 이 진리를 더 깊이 설명하십니다. 생베, 즉 세탁하지 않은 천은 물에 닿으면 줄어드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것을 낡은 옷에 기워 붙이면 세탁할 때 새 천이 줄어들면서 낡은 옷을 찢어버립니다. 옷을 고치려다 오히려 더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포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되면서 팽창합니다. 유연성을 잃은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부대가 터지고 포도주도 쏟아져 버립니다. 새 것과 낡은 것은 함께 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개혁이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운 시대, 새로운 언약, 새로운 창조입니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그 새 언약, 즉 돌 판이 아닌 마음 판에 새기는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성취된 것입니다(렘 31:31~34). 이 새 언약은 옛 언약의 틀 안에 억지로 욱여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 그가 처음 원했던 것은 가톨릭 교회 안에서의 개혁이었습니다. 그는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가능했습니다. 새 포도주는 낡은 부대를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복음의 자유는 율법의 공로 체계라는 낡은 틀 안에 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옛 방식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려 합니다. 내가 충분히 금식했으면, 내가 충분히 기도했으면, 내가 충분히 헌금했으면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으려는 시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어졌다는 복음 위에 내 공로를 더하려는 시도는 복음 자체를 터뜨려 버립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 중요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십자가 사건을 가리키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희미해질 때, 그 분이 나의 주가 아니라 배경으로 물러나 있을 때, 그 때가 금식할 때입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 무너지는 시간입니다.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몸으로 인정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금식의 끝에는 다시 신랑이 돌아오시고,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은혜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 안에 들어온 사람은 새 부대가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옛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의 조문이 아니라 성령으로 살아가는 새 언약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다고(고후 3:6). 새 언약의 일꾼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다 이루었다는 것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 조문으로 전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지만, 성령으로 전하는 복음은 살립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일, 그것은 예수님의 피로 이루신 새 언약의 복음을, 그 복음을 담기에 합당하게 빚어진 새로운 마음 안에 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새 부대가 된 우리가 그 포도주를 세상에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이며, 가장 풍성한 잔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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