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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마가복음

마가복음 - 어떻게 예수를 죽일까, 완악한 마음의 정체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5.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마가복음 3:1~6)

한 회사에 새로 부임한 팀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곪아온 부서의 문제를 정확히 짚어내고, 불필요한 규정들을 손보기 시작했습니다. 직원들의 숨통이 트이고 일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정작 그 부서에서 가장 오래 일하며 '
원칙'을 지켜왔다고 자부하던 고참 직원들이 그 팀장을 몰아낼 방법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무능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유능하고 정확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동안 자신들이 지켜온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3장에서 벌어진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는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그 사람의 아픔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이 사람을 고치는지 아닌지, 오직 그것만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 곁에서, 의사가 규정에 맞게 서류를 작성하는지만 감시하는 감사관 같은 모습입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서류의 형식이 더 중요한 사람들에게 안식일은 더 이상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사람을 옭아매는 올무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자리에서 손 마른 사람을 회중 가운데 세우십니다.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자리로 그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것은 초등학생도 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답이 그들에게 불리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침묵을 보고 그저 안타까워하신 것이 아니라 탄식하시고 노하셨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분명히 옳은 길을 보여주는데도, 자녀가 자존심 때문에 뻔히 보이는 잘못된 길을 고집할 때 느끼는 그 답답함과 슬픔, 그리고 분노와 같습니다.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위험한 다리를 건너려 할 때, 아버지가 안전한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
아버지가 정한 규칙이 아니다"라며 굳이 위험한 길로 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그 고집이 결국 아들 자신을 해칠 것을 알기에 탄식하고 노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식과 분노도 이와 같습니다. 그들의 완악함이 결국 그들 자신과 손 마른 사람 모두를 해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
네 손을 내밀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손을 내밀자,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손을 낫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이 임하는 순간 창조의 능력이 그 자리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마치 죽은 나뭇가지에 갑자기 생명이 흘러들어가 잎이 돋아나는 것과 같은 일이, 말씀 한마디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렇게 생각해야 정상입니다. '이분이야말로 안식일의 참 주인이시구나. 이분을 믿어야겠다.' 그러나 회당 안의 종교 지도자들은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6절은 충격적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의논합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본래 정치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상극이었습니다. 마치 평소 서로 으르렁대던 두 경쟁 회사가, 공동의 위협 앞에서만은 손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손을 잡을 만큼, 예수님의 존재는 그들에게 위협적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방금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병자를 고치신 것, 즉 생명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본 사람들의 결론이 '
생명을 죽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아이러니한 일이 있을까요? 자신들이 그토록 지킨다고 자부하던 안식일의 정신, 곧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여기서 이 본문을 오늘 우리와 무관한 옛날이야기로 남겨두어서는 안 됩니다. 한 성도가 오랫동안 교회에서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하고, 십일조를 빠뜨리지 않고, 봉사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어느 순간 '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은 나에게 이 정도는 갚아주셔야 한다'는 계산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헌신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라는 물음 속에는, 사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도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믿었지만, 실은 자신들이 만든 규정과 자신들의 의로움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체계를 흔드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있어 반가운 구원자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위협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열심이 반드시 진리를 향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열심이 클수록, 그 열심의 대상이 잘못되었을 때 더 큰 완악함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갈 때, 화려한 말과 지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전하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아테네에서 철학자들과 논쟁했을 때는 별다른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만을 전할 때,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믿음이 세워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왜 십자가입니까?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만일 하나님의 지혜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자기 의로움을 무너뜨리는 사건입니다.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이들처럼, 우리 안에도 내가 쌓아온 것이 헛되다는 것을 알려주는 진리 앞에서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를 기억해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곁에 계셨지만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한 몸을 보여주며 믿게 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와 시편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풀어주셨습니다. 그제야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우리 눈의 수건을 벗겨줄 때에야 우리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예수, 내가 원하는 복, 내가 원하는 구원이 아닌 예수님이 내 앞에 서실 때, 나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처럼,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으라 하실 때 나는 손을 내밀 수 있습니까?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시면, 우리도 한때는 '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 궁리하던 자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던 것처럼, 자기 죄를 깨달은 자에게는 회개와 믿음의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을 주로 믿지 않고 내가 주인 노릇 하던 자리에서 내려와, 참된 안식을 주신 그분께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오늘 이 본문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은혜의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