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마가복음 3:20~27)
몇 해 전, 어느 시골 마을에 소문난 부잣집이 있었습니다. 그 집 주인은 힘이 장사였고, 늘 문 앞에 큰 개 두 마리를 묶어두었으며, 창고에는 자물쇠를 세 겹으로 채워두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그 집 담장 안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무서워했습니다. "저 집엔 절대 도둑이 못 들어. 주인이 워낙 세거든."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 집의 세간이 몽땅 사라졌습니다. 그릇도, 이불도, 곳간의 곡식도 하나 없이 텅 비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 힘센 주인은 어떻게 됐소?" 나중에야 밝혀진 사실은, 그 주인보다 훨씬 힘이 센 자가 미리 들어와 그를 꽁꽁 묶어 놓고서야, 유유히 집안의 물건들을 가지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하신 비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막 3:27). 우리가 오늘 살펴볼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자로 여겨졌던 존재가 어떻게 묶였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어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습니다. 병자가 낫고, 귀신 들린 자가 자유케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을 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의 반응은 뜻밖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달려온 것이 아니라, "그를 붙들러" 나왔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 3:21).
생각해 보십시오. 한 청년이 갑자기 집을 떠나 이곳저곳을 다니며 "내가 하나님 나라를 전한다"고 외치고 다닌다면, 오늘날 우리 가족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쟤가 왜 저러지,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하고 걱정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가족들은 그분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지극히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들이 갑자기 세상을 뒤흔드는 행보를 보이니, 가족의 눈에는 광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후 마가복음 3장 31~35절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서 그분을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이는 육신의 혈연을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 공동체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얼마나 낯설고,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오해받을 수 있는 길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가족의 오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의 진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검증하러 일부러 예루살렘에서부터 내려온 종교 엘리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결론은 충격적입니다.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막 3:22). 마치 명의 앞에서 환자를 보고도 병명을 정반대로 진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의사가 암세포를 제거하는 수술을 보고서 "저 사람이 암을 퍼뜨리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눈이 완전히 뒤집힌 것입니다. 성경을 가장 많이 알고, 가장 정확하게 가르친다는 자들이 정작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가 눈앞에 서 계신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그분을 귀신의 왕과 결탁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적 지식의 함정입니다. 지식이 많다고 해서 진리를 보는 눈이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확신이 강할수록, 하나님이 예상 밖의 방법으로 일하실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기관들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반복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성경을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틀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이 억지스러운 비난에 대해 흥분하지 않으시고, 아주 명료한 논리로 반박하십니다.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막 3:23).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막 3:24~25).
한 회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대표이사가 회사의 이익을 갉아먹는 결정을 스스로 내린다면, 그 회사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이 자기 진영의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사탄 자신을 무너뜨리는 자살행위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논리는 서기관들이 도무지 반박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능력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평행 본문인 마태복음 12장 28절이 답을 줍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사역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귀신의 역사로 오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귀신들린 자의 모습이라는 역설이 여기 있습니다.
이제 본문의 핵심 비유에 이릅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막 3:27). 여기서 '강한 자'는 사탄을 가리킵니다. 사탄은 아담의 타락 이후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붙잡아 두고 있는 존재입니다. 마치 앞서 말씀드린 부잣집 주인처럼, 죄와 사망은 우리 마음과 삶이라는 '집' 안의 모든 것을 자기 소유인 양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강한 자를 먼저 결박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신 사건들은, 예수님이 바로 그 강한 자를 이기시는 더 강한 자이심을 눈으로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으로 그 강한 자를 결박하셨습니까? 로마서 5장 17~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사망이 왕 노릇 하였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이 왕 노릇 하던 자리에서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자리로 옮기신 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자주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강한 사탄을 결박하려면 더 큰 세상적인 힘, 곧 세력이나 영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도를 할 때도 사람의 성공이나 힘을 앞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2장 9~10절은 정반대의 길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잠시 천사보다 못하게 되어 죽음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강함이 아니라 죽으심으로, 힘이 아니라 고난으로 강한 자를 이기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씨름 경기에서 상대방을 힘으로 눌러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급소를 스스로 내어줌으로써 오히려 상대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힘으로 힘을 꺾으려 하지만, 하나님은 약함으로 강함을 꺾으셨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15절은 우리의 실존을 정확히 짚어냅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 우리는 흔히 죽음을 생물학적 종말로만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더 넓은 의미의 죽음 속에 매여 삽니다.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좌절, 인격이 짓밟히는 모욕, 관계가 끊어지는 상실, 이 모든 것이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마치 오랫동안 빚에 눌려 사는 사람이 매달 이자를 갚느라 정작 자기 삶을 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죽음의 종노릇에 매여 자유를 잃은 채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죽음을 통하여 멸하셨습니다(히 2:14).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죽음을 이긴 것입니다. 마치 불을 불로 끄는 역설처럼,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무기를 스스로 짊어지심으로 죽음의 권세 자체를 무너뜨리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7~18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하십니다.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이것은 사탄이 힘이 세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기 목숨을 죄와 사망에 붙들린 우리에게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한 아버지가 물에 빠진 자녀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물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아버지는 물의 힘에 굴복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위험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그러합니다. 죽어 있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생명이신 분이 스스로 죽음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 19~20절과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이 남기신 말씀을 전합니다. 떡은 그분의 몸이요, 잔은 그분의 피로 세운 새 언약입니다. 이 새 언약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완성되었다는 선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최후의 만찬 현장에 없었음에도 "주께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성찬이 단순한 사도들의 전통 계승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계시하신 진리임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또한 말씀을 나눌 때마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분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처음 읽었을 때는 가족에게 오해받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모함당하시는 예수님의 외로운 모습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실로 우주적인 전쟁의 승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강한 자, 곧 죄와 사망을 붙들고 있던 사탄은 이미 결박되었습니다. 그 결박의 방법은 힘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으심이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죽기를 무서워하며 이런저런 종노릇에 매여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관계의 실패, 인생의 좌절, 미래에 대한 불안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강한 자에게 붙들려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그 강한 자는 이미 결박되었고, 그 집의 세간, 곧 우리는 이미 해방되어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으로 옮겨졌습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마가복음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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