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마가복음 3:28~30)
어느 목사님이 신학대학원 시절, 선배 목사님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어느 교회에 여자 부흥사가 집회를 인도하러 왔습니다. 사흘째 밤, 회중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손뼉 소리, 흐느낌, 방언 같은 탄성이 예배당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 절정에서 부흥사가 외쳤습니다. "지금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담임 목사님과 장로님들은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 순간 예배당은 술렁였습니다. 몇몇 장로들이 엉거주춤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평소 신앙생활에 그리 열심이지 않던 한 장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지금 무슨 짓들 하는 겁니까!" 예배당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훗날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그날 밤, 누가 옳았을까요?"
답은 뜻밖입니다. 고함을 지른 그 장로는 평소 경건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무릎을 꿇으려고 걸어 나갔던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신실한 사람들이 검증되지 않은 말 한마디에 그토록 순순히 끌려 나갔을까요?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훼방하면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저 강사의 말이 진짜 성령의 음성이라면, 그것을 거역하는 것이 바로 그 용서받지 못할 죄가 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신앙이 깊을수록 오히려 더 두려워하며 끌려갔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시대 많은 성도들의 혼란이 있습니다. 성령훼방죄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누군가 "성령의 이름"만 붙이면 분별없이 따라가거나, 혹은 반대로 분명히 잘못된 것을 보고도 지적하지 못하고 침묵해 버립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에서는 "곧 전쟁이 난다"는 예언을 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말을 듣고 실제로 짐을 싸서 외국으로 피신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예언들을 다 모으면 이미 수십 번은 전쟁이 터졌어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예언이 열 번이 넘도록 빗나가도 여전히 그 사람의 말을 따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일까요? "이분은 우리보다 기도를 훨씬 많이 하시는 분이니까"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기도의 시간과 열심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성경과 달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 예언은 틀렸으니 따르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면, 오히려 "성령 훼방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가 돌아옵니다. 능력과 표적과 기적처럼 보이는 모든 일이 다 성령의 역사는 아닙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분명히 경고합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도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으로 나타나며,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사람들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언가 신비하고 강력해 보인다고 해서 무조건 성령의 일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오히려 위험한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실제로 말하는 성령훼방죄는 무엇일까요? 본문의 배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어둠의 세력을 쫓아내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지켜본 예루살렘의 서기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친족들조차 그분이 미쳤다고 여겨 붙들러 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오셔서 억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고 계신데, 그것을 보고도 "귀신의 짓"이라고 규정하는 것, 이보다 더 뒤틀린 눈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라나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설 수 없듯이,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강한 자, 곧 사탄을 결박해야만 그가 사로잡고 있던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바로 이 문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쳤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용서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이보다 더한 무슨 극악한 죄란 말입니까? 답은 뜻밖으로 단순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그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떠나가야 보혜사, 곧 성령이 오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시면 하실 일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성령이 오셔서 온 세상에 조명하시는 죄의 본질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은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은 거듭 말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나를 증언하실 것"이라고, 성령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사명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라면, 그 증거하심을 끝까지 거부하고 부인하는 것, 곧 그리스도를 저주받을 자, 귀신 들린 자로 규정해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실수나 순간의 연약함이 아니라, 성령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서 있는 그리스도 자체를 끝까지 밀어내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이 진리를 실감나게 보여준 한 장면이 있습니다. 어느 임종을 앞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교회 문턱에도 가지 않았고, 죽음이 임박해서도 "그런 건 믿을 수 없다"며 완강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자녀들이 눈물로 복음을 전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며칠, 그는 오히려 화를 냈습니다. "왜 자꾸 나한테 그 얘기를 하느냐. 듣기 싫다."
반면 같은 병동에 있던 다른 환자는 평생 죄 가운데 살았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사람이었지만, 죽음 앞에서 목사님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예수님을, 그런데 그분이 저 같은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게 정말입니까?"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눈물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두 사람의 죄의 무게를 사람이 저울질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끝까지 그리스도를 밀어냈고, 한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라도 그분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선포했을 때,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그리고 베드로는 대답했습니다.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훼방죄가 결코 절망의 교리가 아니라 은혜의 초청이 되는 이유입니다. 이 죄가 무서운 것은, 그것이 너무 커서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죄를 짓는 자는 애초에 용서를 구하러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그 순간, 이미 성령이 그 마음에서 일하고 계신 증거이며, 그런 사람은 결코 성령을 모독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훼방죄를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밤낮 눈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주님을 붙드는 성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두려움은, 아직도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마음 문을 닫고 있는 이들이 돌아보아야 할 경고입니다.
앞서 부흥회에서 무릎을 꿇으러 나갔던 신실한 성도들처럼, 우리는 종종 애매한 두려움에 끌려 분별력을 잃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령훼방죄의 본질을 알면 두려워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고 붙들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그 증거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령은 단 한 가지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 눈앞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다시 세우시고, "그분이 다 이루셨다"고 증언하시는 일입니다. 그 증언 앞에 우리가 할 일은 하나뿐입니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 증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마가복음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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