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가복음 3:31~35)
한 청년이 몇 년 만에 청년부 예배에 나타났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가운 마음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소개를 시켰습니다. 나중에 그 부모님을 만나 "아드님이 교회에 왔더라"고 인사를 건넸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도 안 나가면 가족관계를 끊겠다고 했어요." 어쩌면 사랑보다는 압박이 그를 교회 의자에 앉힌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그 말을 듣고도 마음 한편이 놓였습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말씀이 들리는 자리에 그가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짧은 일화는 오늘 본문이 던지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진짜 가족이란 무엇인가, 핏줄로 이어진 관계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로 묶이는 관계인가?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부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겹겹이 둘러앉아 있어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지만, 본문은 묘한 대조를 그리고 있습니다. 안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둘러앉은 사람들이 있고, 밖에는 그분의 육신의 가족이 서 있습니다.
이들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앞선 상황과 이어집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다고 몰아세웠고, 친족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여겨 붙잡으러 나선 참이었습니다. 30년 가까이 한 집에서 함께 살아온 가족조차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지극히 평범하게 자라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열두 살 소년 예수께서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고 말씀하신 사건을 전하면서도, 그 뒤에는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기록합니다. 특별한 존재라는 표를 내지 않고, 목수 요셉의 아들로, 이웃집 자녀로 자라나신 것입니다.
그러니 서른 살이 되어 갑자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그 모습이 가족들에게는 오히려 낯설고 두려운 변화로 보였을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일수록 가장 알아보지 못하는 역설, 이것이 바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냉정하리만치 단호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그리고는 곁에 둘러앉은 이들을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서른 해 가까이 밥상을 같이하고 잠자리를 같이했던 가족을 향해 던진 말씀치고는 너무나 매정하게 들립니다.
여기서 잠깐, 한 가지 상상을 해봅니다. 오랫동안 타지에 나가 있던 자식이 명절에 집에 돌아왔는데, 부모가 문 앞에서 "누구세요" 하고 묻는다면 그 자식은 얼마나 서운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가족이 느꼈을 충격도 이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더니, 이제는 정말 가족조차 몰라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을 부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짜 가족의 자격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정의하시는 것입니다. 혈연은 저절로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되게 하지 않습니다. 훗날 예수님의 동생들이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권하면서도 정작 그들 자신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요한복음은 기록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혈육이라도 자동으로 그리스도의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은 예수님의 친동생들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되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35절이 답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란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그 뜻을 이렇게 풀어 주십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결국 하나님의 뜻은 하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자기 결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믿기로 했다"는 표현을 씁니다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인간의 의지에서 솟아나는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다만 그 선물은 조용히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자리를 통해 주어집니다. 밖에 서서 예수님을 미쳤다고 규정한 이들은 그 선물을 받지 못했고, 안에 둘러앉아 말씀에 귀 기울인 이들에게 그 선물이 임했습니다.
바울의 인생이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한때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충성이라 여겼던 사람입니다. 밖에 서서 손가락질하던 사람들보다 몇 곱절 더 강경하게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하는 이유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아무리 완악한 마음이라도 말씀이 들려지는 그 자리에서 믿음은 시작됩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 자리에 가져와 봅니다. "저는 삼대째 믿는 집안입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어요." 이런 말은 신앙의 이력처럼 들리지만, 정작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집안의 풍습이며 문화일 뿐입니다. 교회 마당은 밟고 있지만 여전히 밖에 서 있는 사람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청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으름장에 못 이겨 등 떠밀려 온 걸음이었을지 몰라도, 중요한 것은 그가 말씀이 들리는 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그 자리로 이끄는 계기는 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부모의 성화일 수도, 인생의 위기일 수도, 순전한 호기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사람을 하나님의 새 가족으로 만드는 것은 그 계기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들려지는 그리스도의 말씀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얼핏 매정해 보이는 이 말씀도 결국 같은 진리를 가리킵니다. 세상의 모든 혈연관계는 언젠가 끝이 납니다. 죽음이 갈라놓거나, 세월이 멀어지게 하거나, 오해가 틈을 벌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을 믿어 그분의 가족이 된 이들의 관계는 영원히 갈라서지 않습니다.
밖에 서서 예수님을 미쳤다고 규정하던 육신의 가족과, 안에 둘러앉아 말씀을 듣던 낯선 이들. 이 두 무리 사이에 오늘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이미 새 가족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남은 것은 우리가 그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와, 그분의 발 앞에 앉는 일뿐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가복음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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