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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마가복음

마가복음 - 누구의 믿음인가, 떠나라는 사람들, 모여드는 사람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7.

마가복음 5장 21~43절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거라사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사람이 고침받은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돼지 떼 때문에 재산에 손해가 났다며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고 싶어 한 사람은 고침받은 사람이었고, 예수님이 계시면 손해라며 떠나라 한 사람들이 오히려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없이 배에 올라 맞은편 해안으로 건너가십니다. 그곳에는 벌써 큰 무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무리를 헤치고 한 사람이 달려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립니다.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회당장은 예배를 주관하는 마을의 점잖은 어른이었고,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예수님을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체면을 내려놓고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열두 살 난 딸이 죽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오셔서 손을 얹어 주십시오. 그러면 살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없이 따라나서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에워싸고 밀어대어 한 걸음 떼기도 힘듭니다. 응급실로 가는 길에 차가 꼼짝 못 하는 것과 같아서, 야이로에게는 일 분이 한 시간 같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마가는 이야기를 끊고 다른 이야기를 끼워 넣습니다. 두 빵 사이에 고기가 들어가는 샌드위치처럼, 야이로의 이야기 한가운데 한 여인의 이야기가 들어갑니다. 두 사람의 믿음을 나란히 놓고 견주어 보라는 뜻입니다. 이 여인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았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열두 해를 자라는 동안 이 여인은 열두 해를 앓았습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이런 병자는 부정하여, 누구를 만지면 그 사람까지 부정해집니다. 안을 수도 안길 수도 없는 몸이었습니다. 병을 고치려고 여러 의사를 찾아다니느라 가진 돈도 다 썼지만 낫기는커녕 더 나빠졌습니다.
통장은 비었고, 몸은 더 상했고, 사람들 곁에 설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무리 속으로 끼어듭니다. 부정한 몸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집는 것부터 율법을 어기는 일인데, 선생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그래도 여인은 한 가지만 붙들었습니다. "
저분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는 나을 것이다." 옷자락에 손을 대는 순간 피가 멎었습니다. 열두 해 동안 아무도 고치지 못한 몸이 한순간에 달라진 것을 여인은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십니다. "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제자들은 어이가 없습니다. 이렇게 밀어대는데 누가 손을 댔느냐고 물으시냐는 것입니다. 시장통에서 누가 나를 쳤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어깨가 아니라 한 사람의 믿음을 찾고 계셨습니다. 몸을 부딪친 사람은 많았지만 믿고 손을 댄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여인은 두려워 떨며 나와 엎드려 모든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열두 해 동안 누구에게도 들어 보지 못한 "
딸아"였을 것입니다. 부정하다고 밀려난 사람을 예수님은 딸이라 부르십니다. 병이 낫는 것보다 이 한마디가 더 큰 은혜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믿음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돈이 있어서도, 건강해서도, 신앙의 경력이 쌓여서도 아닙니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나온 믿음입니다.

이야기는 야이로에게 돌아옵니다.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말합니다. "
따님이 죽었습니다. 어찌하여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십니까?" 한 걸음 늦었다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곁에서 들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을 오해하면 믿음만능주의가 됩니다. 믿고 구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야고보서 1장 6절 이하의 "의심하지 말고 구하라"를 끌어옵니다. 못 받는 것은 의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앞뒤도 안 보고 이런 말에 "아멘" 하는 곳에서 교주가 나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1절부터 읽어야 합니다. 복음 때문에 쫓겨나 흩어진 사람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시험이 오거든 기뻐하라고 합니다. 시련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가 우리를 온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합니다. 의심하지 말고 구할 것은 소원 성취가 아니라 환난 중의 지혜입니다. 고난을 당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벌받는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까닭 모를 고난을 받는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야고보는 이어서 세상의 부와 높아짐은 풀의 꽃처럼 지나가니 그것을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구하라고 하신 "
좋은 것"도 누가복음 11장에서는 성령이라고 밝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구하면 하나님은 성령을 주시고, 성령이 오시면 무엇이 죄인지 알고 참으로 구할 것을 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믿기만 하라"는 무슨 뜻입니까? 야이로는 예수님이 손만 얹으시면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길이 지체되는 사이에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병자는 고치셔도 죽은 자는 어쩌실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믿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믿음의 크기를 키우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나를 바라보라. 나를 죽음 앞에서 한계 지으려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집으로 가십니다. 집은 울음과 통곡으로 시끄럽습니다. "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내보내십니다. 믿지 않는 자의 웃음은 그 방에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만 데리고 들어가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아이가 곧 일어나 걷습니다. 마가는 일부러 적어 둡니다.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고 말입니다. 열두 해 앓던 여인과 열두 해를 살다 죽은 아이가 한 이야기 안에서 만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당부하십니다. 온 마을이 울며 장례를 준비하던 아이가 멀쩡히 걸어 다니는데 어떻게 알리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났느냐고 물으면 "
예수님이 살리셨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되는데 그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이 당부에는 책망이 담겨 있습니다. 자기도 믿지 않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신학교 시절 구약을 가르치시던 교수님이 이 본문으로 목회자 세미나를 하시며, 오늘의 목사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한 것을 기억합니다. "
너는 설교하지 마라." 회당장이나 당회장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약사가 자기는 먹지 않을 약을 권하고, 식당 주인이 자기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으면서 맛있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 있어 보이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정작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을 나란히 놓아 보겠습니다. 여인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병, 가난, 부정함, 외면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었습니다. 회당장은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율법의 의로움도, 직분도, 가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이 죽었다는 말 한마디에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이 믿음의 출처를 로마서 4장이 밝혀 줍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몸도 사라의 몸도 닫혀 있는 가운데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는 이 부정한 여인의 믿음은 누구의 것입니까?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에게서 온 믿음입니다. 여인이 자기 안에서 짜낸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4장은 이 믿음이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범죄 때문에 내줌이 되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원인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 손을 잡고 길을 건널 때, 아이를 지키는 것은 아이가 얼마나 세게 잡았느냐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이 손을 잡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얼마나 굳게 믿느냐보다 나를 붙들고 계신 분이 누구시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야이로처럼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위기 앞에서 믿음이 흔들립니다. 때로는 여인처럼 빈손으로 서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 믿음의 크기가 아닙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이런 믿음은 자기를 신뢰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합니다. 그래서 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옷자락 하나를 붙들었던 그 여인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