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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말씀 묵상

마귀가 떠나고 성령이 채워지는 자리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24.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사도행전 5:7~11)

어떤 집사님이 교회 구역장 임명을 받았습니다. 전화를 드렸더니 한참 침묵이 흐른 뒤 이런 말씀이 돌아왔습니다.
"저같이 자격 없는 사람이 어떻게... 저 이혼도 했고, 사업도 망했는데요." 참 묘한 일입니다. 그분은 수십 년째 교회를 다니며 사도신경을 외우고,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역설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마귀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마귀를 영화 속 붉은 피부에 뿔 달린 존재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마귀는 그런 캐릭터가 아닙니다. 마귀, 혹은 사탄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존재의 상태와 그 지향성을 가리킵니다. 즉, 마귀는 하나님 밖에서 작동하는 모든 욕망과 사고와 행위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습니다. 헌금도 했습니다. 겉으로는 신실한 성도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단번에 꿰뚫어 보았습니다.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그들 안에 가득 찬 것은 인정받고 싶은 욕망, 칭찬받고 싶은 마음, 그러면서도 손해는 보기 싫다는 계산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인 것입니다.

시기, 질투, 자기 자랑, 인정 욕구, 이것들은 뿔 달린 존재가 외부에서 집어넣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내버려 두면 인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어도, 아무리 종교적 행위를 열심히 해도, 그 마귀적 속성은 어디선가 불쑥불쑥 고개를 듭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떡을 찍어 유다에게 건네자마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마치 사탄이 기회를 노리다가 그 순간 홀랑 들어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할 일을 속히 하라." 이것은 명령입니다. 사탄에 대한 명령이기도 하고, 구속사의 거대한 흐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유다의 배반은 즉흥적으로 벌어진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창세전부터 계획된 구원의 드라마 안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었습니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탄조차도 그 손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실패, 배신, 상실도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망한 것, 이혼한 것, 병이 온 것, 이것들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사고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그분이 우리를 빚어가시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까요? 에베소서 2장은 그 이유를 담담하게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은혜의 위대함을 보여주려면, 은혜가 필요한 존재의 참담함이 먼저 드러나야 합니다. 마귀 같은 존재가 먼저 폭로되어야, 그 위에 부어지는 은혜가 빛나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상상해보십시오. 자궁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그 무력한 존재, 스스로 숨도 쉬지 못하고, 스스로 먹지도 못하고, 오직 외부의 돌봄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던 그 핏덩이를 하나님의 은혜 없이 내버려 두면 우리는 영적으로 바로 그 상태인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그것이 마귀의 상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이라는 무대를 주셨습니다. 그 무대에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마귀 같은 존재인지를 배우고, 동시에 그런 우리를 어떻게 그분의 자녀로 만들어 가시는지를 경험합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창녀 고멜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고멜은 계속 다른 남자들에게로 떠났습니다. 그때마다 호세아는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어느 날엔 노예로 팔린 고멜을 돈을 주고 다시 사 왔습니다. 은 열다섯과 보리 한 호멜 반, 합하면 은 삼십입니다. 훗날 유다가 예수님을 판 그 가격입니다.

호세아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예수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불행한 결혼 이야기가 아닙니다. 창녀인 신부를 끝까지 찾아오는 신랑, 그 신랑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그 창녀가 우리입니다. 솔직해지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세상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 드라마에 빠져들고, 돈에 마음을 빼앗기고,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혼하고 세상과 간음하는 존재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민낯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실을 다 아시면서도 찾아오십니다. 보아스가 이방 여인 룻에게 자신의 옷자락을 덮어주었듯, 신랑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 위에 그분의 의를 덮어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이혼한 집사님이 구역장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이혼한 상태가 아닌가요. 다만 그 이혼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경험했느냐, 마음속으로만 경험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에는 뜨거운 열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이렇습니다.
"하나님, 사업이 잘 되게 해주세요. 자식 문제 해결해주세요. 더 큰 집을 갖게 해주세요." 이것이 왜 문제입니까?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던 방식을 기억해보십시오. "돌로 떡을 만들어봐. 그러면 사람들이 너를 진짜 메시아로 인정할 거야." "성전에서 뛰어내려봐. 천사들이 받아줄 거야. 사람들이 얼마나 우러러보겠어." "나한테 한 번만 절해. 이 세상 다 줄게."

예수님은 모두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 나라가 약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세상의 힘과 인기와 명예를 주지 않습니다. 대신 영생을 줍니다. 그리고 그 영생을 통해 모든 백성이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풍요 안으로 들어오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세상의 왕이 주는 것들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사탄이 예수님에게 제안했던 그것들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마치 소원 들어주는 자판기처럼 취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살 아이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법을 배웁니다. 귀엽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엄마도 세 살 때 같은 방식으로 기도를 배웠고, 지금은 기도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 살 때 배운 기도가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훈련이었지,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찰스 스펄전은 9세에 복음을 이해하고, 13세에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억지로 시켜서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통치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됩니다. 하나님이 때가 되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그분의 보좌 앞으로 이끄십니다.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억지로 새벽에 일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일어나고 싶어서 일어납니다. 반면 은혜를 모르는 채로 종교 행위만 훈련받은 아이는, 부모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순간 교회를 떠납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렇게 떠나고 있습니다.

다시 처음의 집사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그분이 자신을
"자격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비하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입니다. "나는 실패자야. 나는 이혼한 사람이야. 나는 가난한 사람이야." 이런 말들로 스스로를 찌릅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은 창녀였지만, 신랑이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노예로 팔렸지만, 은 삼십으로 다시 사 왔습니다. 당신은 마귀 같은 존재였지만, 성령이 그 안에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성도란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마귀적 속성이 성령에 의해 점점 잠식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 과정은 느리고,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 안의 마귀가 성령에 의해 조금씩 밀려나는 그 경험, 그것이 신앙이 주는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과정을 외면했습니다. 종교 행위로 자신을 위장했고, 성령을 속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속지 않습니다. 그들이 죽은 것은 형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중한 경고이기도 한 것입니다. 마귀가 가득 찬 채로 성령을 흉내 내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경고 말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그 마귀에서 어떻게 건짐을 받았는지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전부입니다. 드라마에 투자하는 시간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말씀 앞에 앉아보십시오.

성경은 생각보다 훨씬 흥미롭습니다. 그 안에는 인간의 가장 추악한 민낯이 담겨 있고, 동시에 그 추악함을 덮고도 남는 은혜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읽다 보면 자신이 누구인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귀 같았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때 비로소 이혼이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게 된 계기가 됩니다. 사업 실패가 부끄러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 시작된 자리가 됩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빛나게 하는 배경이 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것이 성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이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