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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말씀 묵상

잠긴 문 앞에서 - 은혜를 모르면 선행도 죄가 된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10.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 이러라."(사도행전 5:17~26)

예루살렘의 새벽은 아직 어두웠습니다. 성전 맡은 자들이 파견한 관속들이 공동감옥 앞에 섰을 때, 그들의 손에는 체포 영장이 들려 있었습니다. 자물쇠는 단단했고, 파수꾼들은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자 감옥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곧이어 사람이 달려와 보고했습니다.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갇혀 있어야 할 자들이 바로 그들을 가둔 자들의 코앞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많은 사람이 이 이야기에서 이런 결론을 끌어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억울하게 갇혀도 꺼내주신다. 믿으면 탈출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이야기의 절반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천사는 사도들을 꺼내어 어디로 보냈습니까? 안전한 곳으로, 혹은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사는 그들을 다시 성전으로 보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바로 거기 있었고, 그들을 가두었던 자들이 바로 그 공간의 주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도들을 꺼내신 것은 그들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이 세상 어떤 권력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실제로 사도들은 그 직후 다시 붙잡혔습니다. 하나님은 상황을 해결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첫 번째 질문을 낳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기대합니까?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가두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시기였습니다. 본문은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 시기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이 이야기는 그저 종교 지도자들의 횡포로 읽히고 맙니다.

복음이 선포하는 내용은 사실 매우 단순합니다.
"당신은 죄인이다. 당신 스스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신을 위해 오신 예수를 붙들어야 한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 말이 왜 어떤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듭니까? 이 메시지는 곧 이런 뜻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금껏 쌓아온 것들, 당신의 공부, 당신의 종교 행위, 당신의 도덕적 이력, 이 모든 것이 당신을 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착하게 살았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착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켰고 성전을 지켰으며 백성 앞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와서 말했습니다.
'그것으로는 안 된다. 네 의(義)는 진짜 의가 아니다.' 그 말 앞에서 그들은 고요히 앉아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말을 하는 자들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말씀을 꽁꽁 묶어두면 자신의 착함이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도 같은 논리였습니다. 그분이 자꾸
"죄인"이라고 하니까, 그분을 없애버리면 우리가 죄인이 아닌 세계가 유지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2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어느 도시의 변두리 교회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대학을 중퇴하고 취직도 안 되고 빚만 쌓이던 때였습니다. 담임 목사는 그를 안타깝게 여겨 차를 마련해 주었고, 생활비도 보태주었습니다. 교회 성도들도 십시일반 도왔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자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 청년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목사를 찾아왔고, 스스로 일어서려는 의지를 점점 잃어갔습니다. 도움이 그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걸을 수 없는 사람으로 굳혀버렸습니다. 선한 마음에서 시작한 그 도움이 그에게는 독이 된 것입니다.

선은 늘 선한 의도에서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어떤 선은 사람을 살리고 어떤 선은 사람을 죽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선(善)은 도덕 교과서의 선과 다릅니다. 다말이 시아버지와 통간하여 아이를 낳은 것이 성경 안에서 의로운 행위로 기록되고, 가나안 원주민을 진멸하라는 명령이 하나님의 뜻으로 기록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윤리 감각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선은 하나님의 목적과 방향, 그분의 언약과 구속사의 흐름 안에서만 정의됩니다. 그 언약 밖에서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그것이 반드시 선이 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세상의 눈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수행될 때 선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선악과를 손에 쥔 것입니다.

어떤 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년 상당한 금액을 구제 헌금으로 냈고, 단기선교도 꼬박꼬박 다녀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교회 게시판에 자주 올랐고, 목사는 그를 예로 들어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해부터 헌금 영수증을 모아두기 시작했습니다. 세금 공제 목적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한 해 자신이 얼마나 했는지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 숫자가 자신을 설명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이만큼 했다.' 그 숫자가 없는 해에는 왠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서는 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이것이 정확히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마음이었습니다. 착한 일은 계속되었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말씀을 가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밭에 나가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온 종이 있습니다. 그는 주인의 밥상을 차리고 주인이 다 먹으면 그릇을 치우고 설거지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라.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입니까? 온 우주를 지으시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폐의 폐포 하나하나를 작동시키시며, 재채기 하나에도 수백 가지 신경과 근육이 동시에 반응하도록 설계해 두신 그분 앞에서, 우리가 한 해 헌금 몇 백만 원 드리고 단기선교 한 번 다녀온 것으로 무슨 공적을 쌓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구제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선교 가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문제는 순서입니다. 어디서 시작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은혜를 충분히 받은 자는 자연스럽게 흘러넘칩니다. 그 흘러넘침이 구제가 되고 선교가 되고 봉사가 됩니다. 그러나 은혜를 알지 못한 채 무언가를 하려 할 때, 그것은 점수판 앞에 서는 행위가 됩니다. 그리고 그 점수판 위에서 우리는 서로를 비교하고 줄을 세우고 시기합니다. 바로 사두개인들처럼 말입니다.

선교지에서 공장을 지어주고 국수를 나눠주면서
"예수 믿으면 이렇게 잘 살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에게 다른 복음을 심는 것입니다. 반면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가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다가 그 말씀을 받은 한 사람이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한다면, 그것이 진짜 선교인 것입니다. 복음은 상황을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 상황 너머를 보게 합니다.

다시 새벽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봅시다. 텅 빈 감옥, 잠겨 있는데 안에 아무도 없습니다. 파수꾼들은 그 앞에서 서 있었지만 아무것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성전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을 붙잡은 자들의 눈앞에서, 그들은 다시 말씀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가두려는 시도는 계속됩니다. 어떤 시대에는 감옥으로, 어떤 시대에는 비웃음으로, 어떤 시대에는 세련된 도덕과 인본주의의 언어로 복음을 덮으려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 성전으로 향합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어느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두려는 편입니까, 아니면 잠긴 문 밖에서 새벽을 걷는 편입니까?

그 대답은 한 가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지금 나 자신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려 하십니까, 아니면 내 안의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그분께 기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착한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38년을 누워 스스로 연못에 뛰어들 수도 없었던 그 병자처럼, 자신의 무력함을 아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말씀이 임합니다. 생명의 말씀은 오늘도 성전에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