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사도행전 5:7~11)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 이후, 온 교회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이 두려움은 구원에 대한 불안이 아닙니다. 요한일서가 말하는 '두려움은 형벌이 있음이라'는 구원의 확신 없는 행위 구원관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명령의 두려움은 다릅니다. 이는 은혜 받은 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끊임없이 반성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두려움이 없으면 우리는 방종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외에 다른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재물, 곧 맘몬은 하나님 외에 인간이 의지하는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솔직히 우리는 예수를 믿기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믿음이 더 크지 않습니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과거 시제는 미래에 완성될 결과를 현재로 끌어와 우리에게 환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없다면 현재 상태로는 우리 모두 지옥행입니다. 약속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은 의인이 되는 것이지, 현재의 실체는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이것이 가장 정직한 표현입니다.
구원파는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의인이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에게 "당신은 죽지 않느냐? 죄를 짓고 싶은 욕구는 없느냐?"고 물으면 가끔 실수는 하지만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답합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을 자기 능력으로 붙들 수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은 인간이 주관적으로 갖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역사 속에서 이루신 그 사실을 믿을 때, 그것이 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확신으로 붙들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우리는 수시로 흔들립니다. 마틴 루터도 죽기 직전까지 흔들렸습니다. 자기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죄는 행위로 저지른 것뿐 아니라 마음속 생각까지 포함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죄에 대한 자각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짐승을 먹지 말라"부터 "살인하지 말라"까지 포함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도덕법에 반하는 행위만 죄로 규정하고, 그것만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무서운 죄는 "나는 구원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 죄도 안 짓는 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파를 극단적 금욕주의자와 완전한 방종주의자로 나누는 이유인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사역 5년 동안 율법의 요구를 강력하게 전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하고 있는 것이 불교나 이슬람교 교인들과 무엇이 다르냐?"고 다소 과격하게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두 손 두 발 들고 "나는 못 해요"라고 항복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때 은혜를 덮어씌우려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글생글 웃으며 "나는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은혜로 전환했더니 이번엔 "목사님이 은혜 설교를 하시니 자꾸 게을러진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은혜의 힘을 모르는 것입니다. 은혜의 힘은 우리의 노력과 의지와 선행과 결단을 뛰어넘는 강력한 능력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뒤집어엎는 것입니다.
구원은 단순히 죄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만들지 않으실 수도 있었고, 우리를 죄에 빠지지 않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선악과를 놓아두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죽은 흙인 인간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 자리로 회귀되는 것, 그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선악과라는 소품을 통해 죽은 흙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환골탈태할 수 있는지 설명하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큰 은혜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셨는지 배워야 합니다. 그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죽은 흙이 움직이는 생명체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습니까?
자궁 속 태아는 엄마의 영양공급 없이 절대 살 수 없습니다. 생명선이 끊어지면 죽습니다. 이것이 죽은 흙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 죽은 흙의 자리가 드러나면, 진짜 아버지의 존재도 드러납니다. 핏덩이 같은 내 모습이 폭로될 때, 나를 붙들고 있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서도 계속 처음 자리, 죽은 흙의 자리를 경험해야 합니다. 나를 붙들고 있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나도 알고 세상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들의 삶에서는 행위가 열매로 맺힙니다. 그러나 행위를 은혜에 보태서 죄 사함에 도움이 되게 하겠다는 것은 마귀의 속성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보고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행위를 이야기하는 행위주의는 마귀인 것입니다. 이것은 과격한 표현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옮기는 것입니다. 양심대로 살면 천국이 아닌 지옥에 갑니다.
왜 내 안의 양심과 나는 싸울 수밖에 없습니까? 왜 나는 여전히 죽은 흙이고 무력한 존재입니까? 선을 행하려 하는데 왜 선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 자리로 가서 내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진짜 무서운 적은 기복주의나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진짜 대적은 개혁주의 안에 감춰진 기복과 행위주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혁주의는 로마 가톨릭에서 원래 복음의 형태로 돌아온 그 개혁주의를 뜻합니다.
'이 시대에 진짜 교회가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이 진짜 있는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진짜 이해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내가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이유를 알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뒤로 숨어야 합니다. 나는 죽고 없어져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예수 앞에 서면 내 안에서 나오는 예수의 행위를 칭찬받게 됩니다. "내가 다치고 목마르고 배고플 때 네가 나를 도와줬다"는 칭찬은 사실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칭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의는 예수 자신입니다. "내 행위 말고 예수를 믿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성경 전체는 인간의 패역함과 하나님의 은혜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예배 자리에서 상당히 많은 헌금을 했습니다. 율법을 지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행위를 치셔서 죽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다면 얼마 되지 않은 액수를 숨겨놓고 다 냈다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은혜를 아는 사람은 더 못 해서 안달입니다.
은혜를 알려면 내가 처음 어떤 자리에서 구원받았는지 자꾸 폭로당하고 자각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자기 행위나 의로 막아서 "나는 잘하고 있다"고 하니 은혜가 아니라 내가 신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하기 싫은데 하나님이 하게 만드셔서 끌려가는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은혜의 복음을 더 많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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