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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말씀 묵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3.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사도행전 5:11~14)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노라 고백하면서 전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금했지만, 그 일부를 몰래 감추었습니다. 거짓말이 문제였습니다. 공동체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위선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이 사건을 기록한 누가는 역사가였습니다. 그는 감정적으로 이 장면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냉철하고 정밀하게, 마치 법정 기록처럼 적었습니다. 그가 이 이야기를 보낸 상대는
'데오빌로'라는 인물이었습니다. 높은 벼슬을 가진, 그러나 신앙을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그에게, 아니 그를 통해 모든 교회에 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겁을 주려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이 질문을 품은 채, 우리는 11절로 들어갑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11절) 두려움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를 '벌치적 죄책''책치적 죄책'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 두려움은 죄를 짓고 그 형벌이 무서워 떠는 것입니다. 지옥이 무서운 것, 심판이 무서운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이런 두려움에 형벌이 따른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온전하지 않아서 생기는 두려움입니다.

두 번째 두려움은 다릅니다. 죄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형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내 모습이 두렵고 불편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감각입니다.

어떤 이들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근거로, 죄에 대한 어떤 불편함도 없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들이 이른바 '구원파'입니다. 그들은 죄를 왜곡하고, 심판을 지웁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민감함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마비입니다.

12절에는 사도들의 손을 통해 표적과 기사가 넘쳐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는 이들이 한마음으로 솔로몬 행각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기적을 목격했는데도 가까이 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가는 이것을 일부러 기록했습니다. 역사가의 예리한 눈으로, 기적이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는 절대적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려낸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 돌아와도,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경외와 집중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열지는 못합니다.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적을 일으킨 선지자는 엘리야와 엘리사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선지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기적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같은 왕족 출신 선지자들은 기적이 없었고, 오히려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사도 시대도 비슷합니다. 바울의 후반기에는 기적이 잦아들었습니다. 디모데의 병도 고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때때로 기적을 허락하십니다. 어떤 집사님이 수십 년간 손이 오그라진 채로 살다가 설교를 듣던 중 손이 펴졌습니다. 그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방에 가서 일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설교 한 편을 열댓 번씩 듣습니다.
"내 손이 나은 기적보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게 이렇게 행복하죠?" 그 말이 주위 모든 이에게 기적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기적은 하나님보다 기적 자체를 더 좋아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적보다 기적을 일으키신 분을 더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기적은 제 역할을 합니다.

미국의 작은 한인 교회에서 집회가 있었습니다. 그 마을은 도시 반이 대학 부속 건물이었고, 교인 대부분이 교수나 박사들이었습니다. 설교자에 대한 기대가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던 그들이, 이틀째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두 시간씩 이어지는 성경 강해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특히 청년들이 쌓아두었던 질문들을 터뜨렸습니다.

"영광을 돌린다는 게 무엇입니까? 내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게 어떤 의미입니까?" 그 질문들이 참 귀했습니다. 고민의 흔적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아쉬운 것은 고민은 하면서도 그 고민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미국에 유학 올 때 영어도 공부하고, 미국 문화도 알아보고, 시험도 준비하며 몇 년을 투자했지 않느냐. 그런데 하늘나라의 언어인 성경에는 왜 그만한 노력을 하지 않느냐?"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으로 신앙생활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목사는 성도가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성경의 한 구절을 떼어내어
'오늘 나에게 주는 말씀'으로 읽는 것은 토정비결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떤 구절이든 그것이 성경 전체 안에서 어디에 놓여 있는지, 구약과 신약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신학입니다.

어느 집회에 참석한 사람이 있습니다. 40세도 되지 않은 그는 암세포를 연구하다가 대장암에 걸렸고, 직장과 항문까지 퍼져 인조 항문을 달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모태신앙에 주일학교 교사, 청년부 간사까지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집회 마지막 날, 그가 손을 잡으며 울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 죽을 준비가 안 되었어요. 저 좀 살려주세요."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은 위로 대신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저 천국에서 너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데, 지금 내 손을 붙들고 살려 달라 하면 어떡하느냐. 내 손 놓고 하나님 손을 잡을 준비를 해야지. 지금 나한테 구걸해서 몇 년 더 살아도, 그때 또 똑같은 고통 속에서 살려 달라 할 것이다. 왜 나한테 매달리듯이 하나님한테 매달리지 못하느냐."

그것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을 오래 가졌어도, 죽음이 코앞에 닥치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손을 잡으려 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 사람과 얼마나 다를까요?

어느 지질학 교수가 말했습니다. 칠레 지진보다 더 큰 지진이 일어날 수 있는 지역이 지구상에 일곱 곳이 있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LA 지역 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그런 지진이 LA에 닥친다면 사망자만 백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부는 민심이 혼란스러워진다는 이유로 이 연구 결과를 막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진짜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처럼 들렸습니다. 고가도로가 무너지고, 고층 빌딩이 납작해지는 장면을 우리는 TV로 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너무 많은 이가 죽으니, 이제는 몇 명의 죽음에도 무감각해졌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도, 종말도, 지옥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고 며칠 동안 걸어서 건넌 사람들이 막 건너자마자
"하나님이 어디 있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망각과 무감각은 그토록 빠릅니다.

사도행전 11~14절의 장면을 다시 보면, 기적이 일어나자 교회는 두려움으로 모였습니다. 그것이 진짜 교회의 모습입니다. 기적에 흥분하여 모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앞에 경외감을 가지고 모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외감이 믿는 이들을 더욱 하나님께 집중하게 했습니다.

14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공동체 안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두려움이야말로 하나님이 교회에 심어두시려는 것입니다.

피겨 스케이팅 경기를 보기 위해 예배를 빠지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응원하는 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보다 더 기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스포츠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가 함께하는 두려움입니다. 종말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 종말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대, 이 두 가지가 함께할 때, 두려움은 우리를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이끄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때는 곧 옵니다. 그 날을 두려워하되, 두려움이 은혜에 덮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넋을 놓고 다른 것들에 시간을 쏟으면서, 정작 하늘나라를 준비하지 않는 것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면서 영어 한 마디 공부하지 않고 비행기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만이라도 모여야 합니다. 두려움으로, 그리고 기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지하게 엎드리는 공동체가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