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사도행전 5:19~20)
밤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감옥 안에 있었고,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사자가 그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다' 전하라고 했습니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말합니다. 그 한 글자가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큰 요청인지, 이 글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세계 문학을 꽤 넓게 읽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성경이라는 책은 왜 이렇게 오래 살아남았을까? 호메로스도 셰익스피어도 결국 전문가들의 서재에 머무는데, 성경은 왜 아직도 사람들 손에 들려 있지?" 그는 불신자였지만 그 질문만큼은 진지했습니다.
그말은 들을 목사님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호메로스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만, 성경은 사람들을 바꿔놓기 때문 아닐까요." 감동과 변화는 다릅니다. 감동은 잠시 마음을 흔들고 지나가지만, 변화는 존재 자체를 뒤집습니다. 철학은 사람을 설득하고, 문학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예술은 사람을 아름답게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그 차이가 2,000년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를 플라톤 철학의 변형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로마 제국의 정치적 산물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 설명으로는 납득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철학과 정치는 권력이 있는 곳에서 자랍니다. 그러나 복음은 감옥에서, 콜로세움의 모래밭에서, 아무도 모르는 오지에서 자랐습니다. 핍박받을수록 커졌고, 죽임을 당할수록 번졌습니다. 어떤 인간적 설명도 이것을 다 담지 못합니다.
새벽에 서신서를 읽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적이 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 한 권이 어떻게 수십억 명의 삶을 지금도 붙들고 있을까.' 그리고 곧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이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의 능력이 교회를 세우고, 지금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유다서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짧은 편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초대교회 안에 파고든 이단들을 경계하며 이렇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믿음을 지키라." 율법주의자들에게도, 방종주의자들에게도, 영지주의자들에게도 속지 말고, 처음 받은 믿음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편지가 마무리되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그토록 "지키라, 싸우라, 조심하라" 하다가, 결론에서는 이렇게 끝납니다. "너희를 능히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서게 하실 분께 영광이 있기를 원하노라." 믿음을 지키라고 권면하면서, 실제로 그 믿음을 지키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 전체의 언어입니다. 우리에게 요구하면서도, 그 요구를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문장이 함께 있어야 복음입니다. 어느 한쪽만 남으면, 그것은 율법이 되거나 방종이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지키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이를 악물고 도덕적 행실을 유지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유다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성취를 구원의 근거로 삼는 다른 복음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를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야곱처럼 지팡이를 짚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 지팡이는 나의 능력이나 도덕이 아닙니다. 내 부끄러움을 떠받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 신학교 교수님이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야고보와 바울이 같은 아브라함을 두고 한 사람은 행함을 말하고 다른 사람은 믿음을 말한다. 이 둘은 서로 모순인가, 아닌가?" 강의실이 잠시 조용해졌습니다. 학생들은 대부분 "모순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삶에서는 행함이 나오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결론만 놓고 보면 맞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절반만 말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행함의 절정은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창세기 15장에서,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모리아산의 순종이 그를 의롭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모리아산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수풀에 걸린 숫양이 이삭을 대신하여 죽었습니다. 이삭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죽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살린 것은 아브라함의 순종이 아니라, 이삭을 대신하여 죽은 그 어린 양이었습니다.
야고보가 말한 아브라함의 행함은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 자신의 도덕적 완성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위해 죽은 어린 양,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행함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함입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의 행함에 의존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다른 교회에 초청을 받아 간 적이 있습니다. 교인이 120명쯤 되는 작은 교회였는데, 예배당은 꽤 근사하게 지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한 장로 무리가 담임 목사를 쫓아내려 하고, 이를 막으려는 쪽과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설교 전에 한 장로가 나와서 기도하며 울었습니다. 교인들은 은혜를 받아 우는 줄 알고 함께 훌쩍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 안에는 억울함과 분함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고통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강단에 올라서자 화가 났습니다. 설교 전에 양쪽 사람들이 번갈아 찾아와 상대방을 욕했고, 서로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겉으로는 두 편 모두 그리 틀리지 않았습니다. 규정을 말하면 규정대로였고, 질서를 말하면 질서대로였습니다. 양쪽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옳음이 사람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화주의의 실체입니다. 자신의 옳음과 깨끗함을 무기 삼아 타인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교회 안은 위험해집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해 반드시 죄인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만들어야 자신이 의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 이야기가 여기서 겹쳐집니다. 함은 아버지 노아의 벌거벗음을 보고 형제들에게 고했습니다. 그 행위가 저주를 불렀습니다. 율법의 눈으로 타인의 수치를 판단하는 것, 그것이 함의 죄였습니다. 셈과 야벳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고 덮었습니다. 나도 같은 인간이기에, 그 수치를 보지 않고 덮는 것. 그것이 복음의 방식입니다.
어느 이른 봄날, 왕들이 전쟁을 나갈 때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늦은 오후, 낮잠에서 깨어난 그는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임신이 되었고, 다윗은 그것을 숨기려 했습니다. 남편 우리아를 불러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우리아는 전쟁터의 동료들을 생각해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의 최전선에 세워 죽게 했습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맞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다윗은 그 모든 일이 있고 난 뒤에도 한동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나단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습니다. 양 한 마리 가진 가난한 사람의 어린 양을, 양 떼를 가진 부자가 빼앗아 손님 상에 올린 이야기였습니다.
다윗은 그 이야기 속 부자에게 분노했습니다. "그런 자는 죽어야 한다!" 그것이 자기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나단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죄를 온전히 인식하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끝내 그것을 폭로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건 전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섬뜩한 것이 있습니다. 왜 다윗은 전쟁이 한창인 그 계절에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을까요? 왜 하필 그 오후에 지붕 위를 거닐었을까요? 왜 밧세바는 바로 그 시각에 목욕을 하고 있었을까요?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정밀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다윗 안에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욕망을 드러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허용입니다. 다윗을 진짜 아들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세팅하신 것입니다. 나단은 죄를 폭로한 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다윗은 이후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병들자 금식하며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나라 전체가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일어나 씻고, 옷을 입고, 먹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신하들이 어리둥절했습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는 금식하고 우시더니, 아이가 죽은 지금은 어찌하여 잡수십니까?" 다윗이 대답했습니다. "이제 내가 금식하고 기도한들 아이가 돌아오겠느냐." 그 말 속에 다윗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구원은 내 종교적 열심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욕망의 산물인 죄가 무죄한 이에게 전가되어, 그가 죽어야 잔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이름도 없이 죽은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우리아는 무죄하게 꺾인 뼈의 그림자였습니다. 다윗이 그 죽음들 이후에야 일어나 잔치를 벌인 것은, 그가 마침내 은혜의 논리를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꺾으신 뼈로 내가 즐거워하게 하소서"(시 51:8). 그 고백이 그제야 이해됩니다.
피렌체에 있는 미켈란젤로 미술관에는 완성되지 않은 조각들이 여럿 있습니다. 대리석 안에서 인물이 절반쯤 빠져나오다 멈춘 듯한 작품들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조각이란 돌 안에 이미 있는 형상을 꺼내는 것이다. 나는 불필요한 것을 제거할 뿐이다."
신앙의 성숙도 이와 같습니다. 내 안에 새로운 무언가를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들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내 의지, 내 자신감, 내 스스로 깨끗해질 수 있다는 믿음이 깎여나갈 때, 내 안에 계신 예수가 드러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성숙을 업그레이드로 이해합니다.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 도덕적으로 더 완성된 인격을 갖추어 가는 것,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그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 의지가 죽고, 내 뜻이 죽고, 내 스스로 깨끗해질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죽어갈수록 내 안에 계신 예수만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관절과 골수를 쪼갠다고 했습니다(히 4:12). 그 쪼갬은 나를 죽이기 위한 살림입니다. 내가 연약해질수록 예수의 은혜가 선명해집니다. 내가 칭찬과 박수를 함께 받는 순간, 예수의 영광은 흐려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자리에서 점점 멀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오히려 부담스럽게 여길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비유에 관한 신학서들을 30권 넘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신학자들이 쓴 두꺼운 책들이었습니다. 문장은 어렵고 논리는 치밀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대개 같았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화에서 딱 멈추는 것입니다. 비유를 예수의 십자가로 풀어낸 책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성화가 신앙의 절정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점점 완성되어 가는 것이 복음의 목표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머물면 반드시 공허가 찾아옵니다. 이를 악물고 성화를 향해 달려가던 사람이 결국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그리고 그 실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교회는 "1부는 뜨거운 은사주의 예배를, 2부는 개혁주의 설교를 들으라"고 권유합니다. 성화에서 멈춘 신앙이 뜨거움이라도 채우려는 몸부림입니다. 그것이 지금 한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어떤 사상이나 주의에도 묶여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다' 전해야 합니다. 죄와 타락, 구속과 심판, 회복과 완성까지 전해야 합니다. 그 전체를 전할 때 비로소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당신은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늘 올바름을 요구하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분으로만 느껴진다면, 그분이 계신 곳에 진심으로 가고 싶겠습니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요구는 짐입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곁은 안식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하버드와 예일의 교수직을 내려놓고 라르쉬 공동체에서 지적 장애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아름다운 헌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일기에는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왜 나는 이 사람들이 진심으로 사랑스럽지 않을까. 왜 내 안에서 진심 어린 사랑이 나오지 않을까.' 그 고백이 그를 살렸습니다. 자신 안에 선함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럼에도 그 자리를 지킨 것은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라르쉬를 떠나는 날까지 '나는 저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우월감을 한 조각이라도 품고 있었다면, 그것이 그를 막습니다. 은혜는 도덕적 성취를 계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버드 교수의 헌신과 살인자 김대두의 회심이 하나님 앞에서 같은 자리에 서는 것은, 둘 다 오직 은혜로 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혜에 싸여 천국에 가야 합니다. 그 은혜를 알 때, 새 몸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진심으로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억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그토록 사랑해 주신 분 앞에서 기꺼이 엎드리게 될 것입니다.
임종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덥석 잡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분이 계신 곳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말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다 전하라." 죄를 말하고, 타락을 말하고, 심판을 말하고, 구속을 말하고, 회복을 말하십시오. 그 전체가 생명입니다. 어느 한 부분만 남기면 복음은 짐이 됩니다. 성화에서 멈추면 복음은 율법이 됩니다. 그러나 전체를 전할 때, 그 말씀은 문을 엽니다. 사도들이 갇혀 있던 옥문을 열었듯이, 우리 안에 잠긴 문을 열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 은혜가 당신을 붙들고, 끝까지 세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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