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사도행전 5:31)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북쪽을 향해 걸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지도도 없었고 나침반도 없었지만, 그가 걷는 방향이 옳다는 확신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고 몸을 돌려세웠습니다. 그는 저항했습니다. 익숙한 방향을 잃는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몸이 돌아서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그토록 오래 등지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가 보였습니다.
회개란 그런 것입니다. 헬라어로 회개는 '메타노이아'입니다. 문자 그대로는 '다시 사고하다'는 뜻입니다. 생각의 방향 자체가 바뀌는 것, 삶의 중심축이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회개를 전혀 다른 것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 눈물을 흘리며 제단 앞에 엎드리는 것, 그리하여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을 회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방식으로 회개한 사람치고 끝까지 지킨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결심은 또 무너지고, 눈물은 마르고, 다시 익숙한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방향이 바뀐 것이 아니라 잠시 멈췄다가 다시 걷기 시작한 것에 불과합니다. 출발점도 목적지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진짜 회개를 이해하려면, 우리가 어디를 향해 걷고 있었는지부터 직시해야 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을 향해 달립니다. 더 나은 나, 더 안정된 나, 더 존경받는 나, 더 행복한 나, 그 '나'를 향한 질주는 무척 자연스럽고 또 무척 정당해 보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질주는 계속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지만, 기도의 목적은 여전히 '나'입니다. 헌신을 다짐하지만, 헌신을 통해 얻고 싶은 것도 여전히 '나'의 안녕과 성취입니다. 하나님마저도 나의 욕망을 위해 동원되는 자원이 될 때, 그것이야말로 가장 정교한 형태의 자아숭배입니다.
회개는 바로 그 자리에서 몸이 돌아서는 사건입니다. 나를 향해 달리던 발걸음이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 내 일상에 하나님의 힘을 끌어다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분이 계신 자리로 나아가는 것, 왕의 아들이 혼인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나의 용무를 보다가 잠깐 들르는 것이 아니라, 내 모든 일정을 접고 그 잔치 자리에 앉아 박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향 전환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결심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의지의 힘으로는 어림없습니다.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반듯하게 자랐고, 신앙도 좋았으며, 스스로 꽤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타락한 세상과 다른 부류에 속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믿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일이 찾아왔습니다. 오랜 유혹 앞에서 그만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던 바로 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수치심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바닥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으로 진심으로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 없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문이 아니었습니다. 결심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백이었습니다. 바닥까지 내려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꾸밈없는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를 기다리고 계셨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회개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때로는 실패를 통해, 때로는 고통을 통해, 때로는 부끄러움을 통해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선포해도 아무도 하지 않으니, 회개하게 하시는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의 연약함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과 부딪힐 때마다, 이런 고백을 배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육신을 죽이지 않았다면, 저는 이 육신을 안고 영원을 살 뻔했습니다." 그 고백이 쌓일수록 육신의 욕망에 진절머리가 나는 것, 그것이 회개의 열매입니다. 누군가 결심해서 만들어내는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삶을 통해 빚어내시는 변화입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죄를 도덕적 실패로 이해합니다. 거짓말, 폭력, 간음, 살인, 그것들이 죄의 목록인 줄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전쟁터로 보내 죽게 하고 밧세바를 취했습니다. 율법의 기준으로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 인간에 대한 잘못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죄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문제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도덕적 실패는 법과 윤리의 영역에서 다뤄지지만, 죄의 궁극적 판단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사울 왕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말렉을 진멸하라 명하셨습니다. 사울은 흠 없는 가축들을 살려두었고 아각 왕도 살렸습니다. 제사에 쓰려는 경건한 마음으로, 왕을 살리는 관대함으로 말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칭찬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죄라 하시고 사울을 폐위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의 판단을 덧붙인 것이 죄였습니다.
죄는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판단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 위험한 자리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스스로 선과 악을 나누고, 옳고 그름을 결정하며, 그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개혁하겠다 나서고, 목사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헌금이 어디에 쓰여야 옳은지 따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선악과를 손에 든 아담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러시아에 소련이 무너졌을 때, 한 교단이 막대한 자금을 들고 들어가 교회당을 세우고 생활비를 지원했습니다. 선한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선의가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옳다고 판단한 선이 하나님의 선과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공사를 맡긴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수억 원을 날린 일이 있었습니다. 당회는 발칵 뒤집혔고 담당 장로는 문책을 받았습니다. 그때 담임목사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 돈으로 세상의 악함과 돈의 무가치함을 배웠다면, 그 돈은 가치 있게 쓰인 것입니다." 그 말이 폭탄처럼 터졌습니다. 우리는 왜 우리의 선악 기준으로 하나님을 재단하려 했습니까?
영화 〈밀양〉에는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들을 잃은 신애는 긴 고통 끝에 살인자를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교도소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철창 너머의 남자는 평온한 얼굴로 말합니다. "저는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용서해 주셨어요." 신애는 그 자리에서 쓰러집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하늘을 향해 소리칩니다. "네가 뭔데,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저 인간을 용서해?"
그 분노는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 분노의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나는 이제 용서를 베풀 수 있는 고귀한 존재가 되었다"는 자기 확인의 욕망이 있었습니다. 용서를 통해 자신의 선함을 증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선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자아숭배였습니다. 스스로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용서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청렴하고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기독교의 목표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법정 스님이나 성철 스님은 누구보다 깨끗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요 죽은 흙입니다"라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의를 붙드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스스로 다 해놓고 하나님께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공로 안에 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날마다 죽는다"라고 했습니다. 날마다, 라는 말은 매 순간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그 십자가는, 어느 날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날까지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품에 안고 매 순간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거기에 세상적 행복이 끼어들 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전혀 다른 것이 피어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법정 스님처럼 살도록 훈련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친해지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깨지고, 고통 속에서 낮아지고, 눈물 속에서 조금씩 그분께 가까워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살면 됩니다. 거창한 결심 없이, 위대한 헌신 없이, 완벽한 도덕 없이, 다만 하나님의 은혜만 놓지 않으면 됩니다. 그분이 경험하게 하시는 것들을 경험하면서, 그 안에서 그분을 배워가면 됩니다. 말씀 앞에서 부서지고, 칭찬에 속지 않고, 악담에 상처 입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티끌이요 죽은 흙입니다. 그러나 죽은 흙을 덮는 아버지의 영광은 그 어떤 것보다 눈부십니다.
회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서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일은 반드시 완료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사로잡힌 자로서, 그분의 손에 이끌려 걷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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