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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말씀 묵상

죽은 흙이 왕이 되는 이야기 - 부활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28.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사도행전 5:30~31)

어느 봄날, 한 노인이 오래된 화분 하나를 마당에 내놓았습니다. 겨우내 바싹 말라 죽은 것처럼 보이던 나뭇가지였습니다. 가족들은 진작 버리라고 했지만, 노인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봄이 되자 그 앙상한 가지 끝에서 작은 초록 잎 하나가 돋아났습니다. 노인은 그것을 보며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사도들이 이상하리만큼 한 가지를 반복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설교할 때마다, 재판받을 때마다, 심문받을 때마다 그들은 같은 말을 합니다. "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 부활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순히 기적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부활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결국 다시 죽었기 때문입니다. 무덤에서 걸어 나온 나사로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지만, 그것은 끝이 유보된 이야기입니다. 그의 삶은 연장되었을 뿐, 죽음이 취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다릅니다. 부활은 죽음 자체가 취소되는 사건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은 예수님을 "
죽었다가 살아나셔서 먼저 난 자"라고 표현합니다. '먼저 난 자',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선언입니다. 다시는 죽지 않는 생명, 영원을 소유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나와 관계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왜 그것을 나의 이야기로 선포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
시간'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수천 년 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 사건은 시간적으로 우리와 엄청난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 행위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원죄'라 합니다. 처음 이 교리를 접한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내가 거기 있지도 않았는데, 왜 내 잘못입니까?" 그러나 바로 그 질문 안에 열쇠가 있습니다.

원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시간의 장벽을 넘어 그 자리에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분절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시간대, 즉 '
영원' 안에서는 모든 시간이 하나의 평면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던 그 순간과, 내가 지금 이 글을 읽는 이 순간이 그분 앞에서는 동시에 보입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영원 안으로 뛰어올라 그 십자가에 함께 달려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에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미래에 부활하기를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이미 영생 안에 있는 자입니다. 지금 이 삶이 영원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왜 이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역사를 허락하셨습니까? 루시퍼의 타락을 아셨다면, 왜 막지 않으셨습니까? 타락한 인간을 왜 즉시 새로 만들지 않으셨습니까?

어느 어머니가 아들을 키우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아들이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단번에 모든 것을 차단하면 될 일입니다. 핸드폰을 끊고, 전학을 보내고, 통제하면 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그 세계의 실체를 보기를 기다렸습니다. 왜입니까? 강제로 막힌 아이는 기회만 되면 다시 그리로 갑니다. 그러나 스스로 "
이건 아니다"를 깨달은 아이는 돌아옵니다. 그리고 다시는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경영이 그러합니다. 이성과 인격을 지닌 존재를 만드신 하나님은, 강제로 복종하는 로봇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는 자녀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긴 역사가 있습니다. 탕자가 돼지우리에서 스스로 '
내가 미쳤구나'를 깨달아야 했듯이, 인류는 역사 전체를 통해 '하나님 없는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
아담'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아다마'는 먼지, 티끌입니다. 인간이 먼지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본래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담은 언어입니다. 죽은 흙, 그것이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그 죽은 흙이 하나님의 생명을 입어 그분 나라를 다스리는 존재가 된다는 것, 그 경이로움을 역사와 삶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역사의 종결은 이 배움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다시는 돼지우리로 돌아가지 않겠다"를 삶으로 배운 그날, 더러움과 썩어짐이 걷히고 진정한 나라가 완성됩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이 전부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봄이 되어 마당에 꽃나무를 심으려 했습니다. 돌땅을 파헤치니 그 안에 지렁이, 바구미, 수없이 많은 생명체들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존재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심으려 한 나무의 뿌리에는 하나하나 생장점이 살아 있어, 그 작은 뿌리들이 바위를 뚫고 있었습니다. 꽃봉오리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의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들은 인체의 정교함 앞에서 경외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림은 시간을 멈추게 하고, 춤은 몸이 언어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로마서 8장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기다리며 탄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천국은 이 세상을 지워버린 곳이 아닙니다. 왜곡과 더러움이 제거된, 이 세상의 완성된 모습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4절은 "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합니다. 감사함으로 받는 순간, 그것은 자기 자랑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 됩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 "내 취향이 고상하다"는 증거로 삼는 것과, "이런 것을 만드신 하나님이 놀랍다"고 받는 것은 전혀 다른 삶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경계해야 할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일수록 더 깊이 빠지는 함정입니다. 바로 '
자기 의'입니다.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 내내 야학에서 지적 장애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8년간 단 하루도 쉬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서는 "요즘 보기 드문 청년"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하나님이 그의 내면을 들추셨습니다. "
네가 정말 그 아이들을 사랑했느냐?" 그 질문 앞에서 그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그 봉사 현장이 어디 나가서 노는 것보다 쾌감이 더 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깨끗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느낌, 그 자기 도취가 동력이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금식했고, 십일조를 냈고, 불의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향해 "
독사 새끼"라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단 한 줄이었습니다. "저 세리 같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그 말 한마디가 모든 경건한 행위를 독으로 만들었습니다. 착한 행위가 자기 자랑의 근거가 되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자기 숭배가 됩니다.

두 아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 아이는 부모 말씀에 잘 순종하고, 가정예배를 드리고, 공부도 열심히 합니다. 다른 아이는 게임만 하고, 방은 지저분하고, 성적도 지지부진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아이가 어느 날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
왜 나는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들이 부러운 걸까. 성경에서는 다 쓸모없다 했는데, 왜 나는 그게 당겨지지? 나는 왜 이렇게 못난 걸까." 그 괴로움 끝에 그 아이가 십자가 은혜를 붙들었다면, 하나님은 어느 쪽을 더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함'은 인간의 도덕 기준과 다릅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더러움을 직면하고, 그것을 덮는 은혜를 꼭 붙드는 자를 선하다 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이 좋으면 삶이 나아지기를 기대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고, 가정이 화목해지고,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의 삶은 썩어짐의 종노릇 속에 있다고 말입니다. 어떤 성도가 오랫동안 기도해온 것이 있습니다. 자녀의 건강, 배우자와의 관계, 오래된 재정적 어려움, 기도할수록 나아지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때 "
왜 하나님이 이것을 허락하시는가"라는 질문이 옵니다. 그 질문에 울분을 쏟아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조금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
내 삶에 이것만 있었더라면 정말 행복했을 텐데"라는 결핍, 그것이 때로는 우리가 이 세상에 완전히 눈을 팔지 못하도록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이 세상이 살 만하다고 느껴질수록, 우리의 눈은 점점 하늘에서 멀어집니다.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우리를 계속 하늘 쪽으로 돌아보게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에 저항하다 처형되기 직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
이 순간이 끝이 아니다. 나에게는 삶의 시작이다."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젊음도, 결혼도, 오랜 사역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 앎이 그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이 세상의 고통과 부족함 속에서도 부활의 소망,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감정으로는 불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행 한가운데 하늘의 기쁨과 소망이 함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겨우내 죽은 것처럼 보이던 나뭇가지에서 봄이 되자 잎이 돋았습니다.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죽은 흙이었습니다. 아무 쓸모없는 먼지였습니다. 그 죽은 흙이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살아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 역사가 끝나는 날, 더러움과 왜곡이 다 걷힌 완성된 나라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인격과 성품이 우리 안에 가득 부어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 세상 살맛이 나지 않는 것, 기대했던 것이 채워지지 않는 것, 그 모든 것이 우리를 그 나라를 향해 걷게 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랑입니다. 죽은 흙이 왕이 되는 이야기, 그것이 부활이고, 복음이고,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사도행전 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