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죽이고자 할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이에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사도행전 5:33~42)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공들여 모은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항아리를 평생의 자랑으로 여기며 닦고 또 닦았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저기…… 그 항아리 안에 뭐가 들었는지 한번 열어보셨습니까?" 뚜껑을 열자 썩은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오래된 오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뚜껑을 다시 덮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공들여 닦은 항아리인데." 그는 냄새를 맡고도 항아리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사도행전 5장의 장면은 처음 읽으면 당혹스럽습니다. 사도들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죽임을 당할 뻔했을까요?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루의 반 이상을 기도와 말씀 읽기에 쏟았고, 나머지 시간은 구제와 봉사에 사용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하루 세 번 정시에 기도했으며, 십일조를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습니다. 도덕적으로 흠 잡을 데 없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살아온 이들입니다.
반면 사도들은 어떠했습니까? 어부, 세리, 당시 사람 취급도 못 받던 이들이었습니다. 내세울 종교 행위 하나 없었고, 신학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한 마디를 붙들고 거리를 돌아다녔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착하고 존경받던 사람들이, 이 무식하고 볼품없는 사람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5장에 단서가 있습니다. "너희가 예수의 복음을 온 성에 가득히 전하여 그 피를 우리에게 돌리려 하는구나." 그들은 예수를 죽인 일에 깊이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데, 누군가들이 와서 자꾸 그분이 살아나셨다고 외치는 겁니다. 자신들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이려 했습니다. 착한 사람이 채찍을 듭니다. 여기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행동은 인간의 기대와는 정반대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었다면, 부활 후 가장 먼저 어디로 갔을까요? 자신을 재판하고 사형 선고를 내린 빌라도에게, 대제사장에게,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찾아갔을 것입니다. 찬란하게 나타나 그들 앞에 서서 "내가 살아났다"고 선언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방식입니다. 증거를 들이밀고, 힘을 과시하고, 세상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잠깐 나타나셨다가, 갈릴리로 가라 하셨습니다. 갈릴리는 변두리입니다. 벼슬도 없고, 세력도 없고, 비전도 없는 깡촌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고기를 잡으며 연명하던 그 호수가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그 일상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의 빛을 받고,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 엄청난 경험 이후 곧바로 복음을 전하러 나갔지만, 예루살렘에서 뚜드려 맞고 바구니에 실려 밤에 성벽을 넘어 도망쳤습니다. 그 후 아라비아에서 3년, 고향 다소로 돌아가 13~15년을 보냈습니다. 나중에 바나바가 찾아와 데려갈 때에야 비로소 사역이 시작됩니다.
다소는 바울이 나고 자란 곳입니다. 갈릴리처럼, 그의 처음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쓰시기 전에 반드시 그가 난 처음 자리로 먼저 밀어 넣으십니다. 거기서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준비입니다. 화려한 훈련이 아니라, 자신의 밑바닥을 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대단한 용사가 될 것이라 기대하지 마십시오. 성도는 하나님을 돕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루하루 그 젖줄에서 떨어지는 생명력으로 연명하는 존재입니다. 그 연약함을 아는 것, 그것이 성숙입니다.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전한 것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곧 메시아, 구원자. 이 한 마디는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언입니다. 예수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것들인 기도를 많이 하면,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성경을 많이 읽으면, 이것들이 우리 구원에 기여할 수 있습니까?
기도의 양으로 따지자면, 대순진리회 신자들은 하루 여섯 시간씩 기도합니다. 헌신의 깊이로 따지자면, 이슬람 신학생들 중에는 자신의 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경 암기로 따지자면, 어떤 교도소 수감자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외웠다는 신문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지금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표지는 종교적 열심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의존한다는 것은 "나는 아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돈을 믿는 이유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에 돈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이 고백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밑바닥에는 반드시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인입니다. 오늘이라도 지옥 보내주십시오." 이 말이 과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가 얼마나 깊은지, 그것을 덮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정말로 본 사람은 이 말이 결코 과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도 나를 덮으신 그 은혜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부활 이후, 베드로는 "나는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말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따라갔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부활을 직접 본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이해됩니다. 부활하셨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당장 밥은 어떻게 먹는가, 현실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갈릴리 바다에서 그들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2천 년 전 갈릴리 호수는 지금과 달랐습니다. 물반 고기반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손을 넣어도 고기가 잡힐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테랑 어부들이 밤새 그물을 던졌는데 한 마리도 안 잡혔습니다. 이것은 설명이 안 됩니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적이라고 하면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도의 삶 속에서 행하시는 기적은 종종 이런 것입니다. 분명히 되어야 하는데 안 됩니다. 충분히 준비했는데 막힙니다.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없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가" 그 자리, 바로 거기서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그날 아침 호숫가에 서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 장면은 그냥 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늘의 풍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는 바다에서, 그분의 말씀 하나에 그물이 찢어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이 리듬 안에 있습니다. 먼저 비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리고 채워주십니다. 베드로는 그 처음 부르심의 자리에서도 이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 이후, 갈릴리로 돌아간 그 자리에서 다시 똑같은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원점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밤을 기억하십니까? 횃불 곁에 서서, 예수님을 빤히 바라보는 이들 앞에서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세 번이나, 나는 저 사람 모른다." 그리고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통곡했습니다. 그 닭 울음소리는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울립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외면했고, 우리 편의대로 이용하려 했습니다. 더 솔직하게는, 우리 안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린 자아가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어보겠다는, 내가 주인이 되겠다는 그 자아가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이것이 드러납니다. 위장된 상태로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래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자기 기만이 벗겨집니다. 그리고 닭이 울 때 베드로처럼, 통곡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베드로를 갈릴리 호숫가에서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습니다. 세 번의 부인을 세 번의 고백으로 덮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내가 잘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장 추하게 드러난 그 자리에서 찾아오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정리하면 하나의 아이러니가 남습니다. 은혜를 전하면 미움을 받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사도들을 죽이려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은혜의 복음이었는데, 그 복음이 가장 착하고 경건한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은혜는 자존심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만 됩니다"라는 말 앞에서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동안 한 것은 뭐야?" 평생 공들여 닦은 항아리 안에 오물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발각당한 그 사람처럼, 뚜껑을 다시 덮으려 합니다. 그래서 자기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은혜를 전하는 이들을 견디지 못합니다. 채찍으로 칩니다. 2천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채찍을 맞고 나오면서 찬양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이 이름을 위해 고난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셨는가." 이것이 은혜를 아는 사람의 반응입니다. 억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뻤습니다. 자기에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은 잃을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조금 남겨두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좀 더 착해지면 완성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언약하신 그 구원의 언약을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이 말이 믿어지면, 인간은 변합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로 삽니다. 의무가 아니라 사랑으로 삽니다. 잘 보이려는 노력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에 반응하여 삽니다.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용돈을 받으면, 그 용돈으로 부모에게 선물을 삽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먼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받은 것이 없는 사람은 드릴 것도 없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내놓는 선행은, 결국 자기 의를 쌓기 위한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이 내놓는 선함은, 다릅니다.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채찍 소리가 납니다. 그 소리를 내는 것은 착하고 경건하고 존경받는 사람들입니다. 맞는 것은 무식하고 볼품없고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채찍 소리 뒤에 찬양 소리가 납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의 소리입니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의 자유입니다. 자기 의가 없는 사람들만이 낼 수 있는 소리입니다.
우리 안의 항아리 뚜껑을 열어야 합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보고도 "내 백성아, 자유로워라"고 말씀하시는 그 은혜 앞에 서야 합니다. 채찍 소리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 냅니다. 찬양 소리는 은혜를 아는 자들이 냅니다.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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