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사도행전 5:40~42)
법정 문을 나서는 사람의 얼굴을 상상해 보십시오. 등에는 채찍자국이 선명하고, 걸음마다 통증이 밀려옵니다. 그런데 그 얼굴에 웃음이 걸려 있다면,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충격을 받아 정신이 나갔나" 하고 의아해할지도 모릅니다.
사도행전 5장의 마지막 장면이 바로 그렇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도들을 채찍질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며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맞고 나가는 사람이 이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짧은 장면 안에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의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갈며 죽이려 했던 공회원들, 세상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 지혜롭고 합리적이었으나 결국 시류와 성공이라는 잣대로 판단을 내린 가말리엘, 그리고 아무 잘못도 없이 매를 맞고도 기뻐하며 걸어 나간 사도들입니다. 이 세 반응의 간격이 바로 오늘 우리가 들여다보아야 할 질문입니다. 나는 이 중 누구의 얼굴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느 두 사람이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고 해 보십시오. 한 사람은 이 도시를 "성공해야 살아남는 전쟁터"로 그린 지도를 들고 다닙니다. 그 지도 위에서는 높은 건물일수록, 넓은 평수일수록, 두둑한 통장일수록 좋은 곳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같은 도시를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넷길, 그러나 그 끝에 본향이 있는 여정"으로 그린 지도를 들고 다닙니다. 이 지도에는 성공과 실패 대신 "충성했는가, 사랑했는가"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같은 도시, 같은 거리, 같은 사건을 지나가면서도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전혀 다르게 반응합니다. 첫 번째 지도를 든 사람은 승진에서 밀리면 세상이 무너진 듯 절망하고,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못 가면 인생이 실패했다고 여깁니다. 두 번째 지도를 든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도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어디로 이끄시는가"를 묻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관입니다. 우리 각자가 손에 쥔 지도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지도를 조금 손보는 일이 아닙니다. 지도 자체를 통째로 바꾸는 일입니다. 옛 지도를 들고 예수님이라는 목적지 하나만 추가로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지도로 갈아 끼우는 것, 그것이 거듭남입니다.
가말리엘은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끝내 첫 번째 지도를 손에서 놓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 일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무너뜨릴 수 없다"고 말할 만큼 통찰이 있었지만, 판단의 기준은 여전히 "시간이 지나 보면 성패가 드러난다"는 세상의 저울이었습니다. 반면 사도들은 완전히 새로운 지도를 손에 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매를 맞는 그 순간에도 지도 위의 좌표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한 아버지가 밤 열두 시가 넘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아이 방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대견하기도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칩니다. "이 어린것이 이 시간까지 매달려서 결국 얻어내야 할 것이 무엇이기에." 다음 날 아침, 학교 가기 싫다는 아이의 손을 잡고 차라리 바닷가로 데려가고 싶은 충동이 듭니다.
이 장면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우리 시대 부모들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돈을 많이 벌어라. 좋은 자리에 올라가라. 우리를 자랑스럽게 해 다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우리는 자녀를 우리 자신의 트로피로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가 좋은 성적을 받아오면 내가 잘 키운 것 같고, 자녀가 기대에 못 미치면 내 인생이 실패한 것 같은 그 마음, 그것이 바로 자녀를 향한 은밀한 폭력입니다.
자녀는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할 한 영혼이며, 나를 거쳐 잠시 맡겨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녀에게 "세상의 힘만이 너를 살릴 유일한 무기"라고 가르치며,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지나가도 흔들리지 않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이가 "선생님이 하라고 해서 한다"고 답할 때, 우리는 그 순종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이와 함께 진지하게 이야기해 본 적이 있습니까?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결혼, 그리고 결국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찾아오는 죽음, 그 끝을 향해 아이를 그저 열심히 달리게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예배당 강단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리셨던 한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암 투병 끝에 회복의 기미가 보여 온 교우들 앞에서 찬양을 올려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암이 다른 곳으로 전이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분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하시는 말씀은 뜻밖이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 말씀을 못 듣고 하나님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이 병을 앓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재력도 있고 자녀도 잘 되어 세상 기준으로는 부러울 것 없던 분이 죽음 앞에서 고백한 것은 재산도 명예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것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대개 죽음이 저 멀리 있다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이 코앞에 닥치는 순간, 평생 쌓아온 것들의 진짜 무게가 드러납니다. 통장의 잔고도, 자녀의 성취도, 사회적 지위도 그 순간에는 아무 말도 걸어오지 못합니다. 오직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만이 남습니다. 이 장로님은 몸을 가누기 힘든 중에도 매일 인터넷으로 설교를 찾아 들으셨습니다. 그것이 그분에게 남은 유일한 위로였기 때문입니다.
부부 싸움의 대부분은 왜 일어날까요?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 밑바닥에는 "당신이 나를 빛나게 해주지 않는다"는 서운함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돋보이게 해주지 않아서 서운하고,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아서 서운합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배우자를, 자녀를, 동료를 "나를 채워주는 도구"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생명력을 부어 받은 존재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나를 빛내주지 않아도, 이미 채워진 자리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상대방의 부족함을 만났을 때 오히려 이렇게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아, 내가 채울 자리가 생겼구나. 내 신앙이 자랄 기회가 왔구나."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삶입니다. 옛 자아를 조금 개선한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존재로 지어진 것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런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제 자식이 잘되게 해주세요. 제 사업이 형통하게 해주세요. 저를 위로해 주세요." 이 기도의 밑바닥을 조금 더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 제가 원하는 것만 주시고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살겠습니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지성소의 휘장을 찢으신 이유는,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며 그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하나 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구할 것은 세상 것들의 목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으로 지어져 가게 해 주소서"라는 한 가지여야 합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 하나님이 들어오실 자리가 없다면, 진짜 기도는 "나를 비워주세요"에서 시작됩니다.
이 세상의 논리는 단순합니다. 이겨야 삽니다. 스포츠도, 회사에서의 경쟁도, 심지어 아이들의 게임까지도 이겨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논리는 정반대입니다. 짐으로써 이기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이깁니다. 사도들을 채찍질하며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승리감에 취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저들을 굴복시켰다." 그러나 정작 매를 맞고 나간 사도들의 얼굴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누가 진짜 이긴 것입니까? 성도의 삶이란 바로 이 역설의 자리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지금 내가 겪는 어려움이, 그로 인해 내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조금씩 내려놓는 계기가 된다면, 그 어려움 자체가 복입니다.
목회자가 가장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은 임종을 앞둔 교우의 손을 잡을 때입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했다고 자부하던 이가 마지막 순간 "목사님, 나 좀 살려주세요"라고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 그 긴 세월의 신앙이 무엇을 향했었는지 다시 묻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차라리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다"고 고백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것은 그가 평생 하나님과 친밀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그저 무언가를 얻어내는 도구로만 여기며 살아온 사람에게는, 막상 하나님이 손을 내미시는 그 순간 그 손을 알아보지 못하는 비극이 찾아옵니다. 60년 신앙생활, 여러 개의 교회 개척이라는 이력이 있어도, 정작 하나님과 친하지 않았다면 그 모든 수고는 마지막 순간 아무 말도 걸어오지 못합니다.
은혜의 복음을 전하면 종종 오해가 따라옵니다.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구나." 그러나 이것은 은혜를 정반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은혜 안에 들어간 사람은 오히려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순종이 기쁨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그만두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됩니다.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자유롭게 들린다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섬김이 두려움이나 의무감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반증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은 그 길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치 한 공동체 안에서 가장 수고하는 손길들이 있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그 자리에서 계속 이끌어 쓰십니다. 그 부르심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붙드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 차를 타든 작은 차를 타든, 좋은 옷을 입든 검소하게 입든, 그 자체는 신앙의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일부러 초라하게 살며 그것을 신앙의 훈장처럼 여기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고, 풍요를 누리는 것을 죄스럽게 여길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그 풍요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 그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하나님이 풍성함을 허락하시면 감사함으로 누리고, 궁핍함과 고난을 허락하시면 그 수업을 성실히 받으면 됩니다. 그렇게 오르내리는 인생의 굴곡 속에서 매 순간 함께하신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가다 보면, 마침내 그 손이 나를 본향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게는 모든 것을 해로 여길 뿐 아니라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도 유익이라." 이 고백이 낯설게 들린다면, 그것은 아직 우리 손에 옛 지도가 쥐어져 있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매를 맞고도 웃으며 걸어 나갔던 사도들처럼,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주의 이름을 위해 이런 몫을 감당할 만큼 내가 자랐구나" 하고 고백할 수 있는 그날까지, 한 걸음씩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의 참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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