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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말씀 묵상

하나님 순종과 인간 중심주의의 대립 - 사람보다 하나님께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24.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사도행전 5:29~32)

어린 시절, 동네마다 으레
'영웅' 한 명쯤은 있었습니다. 주먹이 세거나, 공부를 잘하거나, 아니면 그냥 이유 없이 당당한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그 사람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랐습니다. 왜였그랬을까요? 그가 옳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 안에 내가 되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따르는 것은 결국 내가 원하는 나를 향해 걷는 일이었습니다.

어른이 된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무대가 커질 뿐입니다. 독일 국민은 히틀러에게 열광했고, 이탈리아는 무솔리니에게, 러시아는 스탈린에게, 프랑스는 나폴레옹에게 마음을 통째로 바쳤습니다. 그들이 그 영웅들에게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강함이었고, 승리였고,
'우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 영웅들은 거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거울 속에서 더 크고 강한 자신을 보며 환호했습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열광하는 영화 속 영웅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캐릭터들이 가진 것은 초능력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의 규칙을 무시하고, 자기 방식대로 살며, 끝내 이깁니다. 관객은 그 이야기 속에 자신을 밀어 넣습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 텐데. 그 순간 스크린 속 영웅은 나의 분신이 됩니다. 우리는 영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웅을 통해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구조입니다. 하나님을 잊은 인간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중심에 세우는 것입니다. 노골적인 이기주의만이 죄가 아닙니다.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그 헌신의 동력이
'나'라면 그것은 여전히 '나'에게 순종하는 삶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선언은 단순한 용기의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문제를 건드리는 말입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신학자요 음악가요 의사였습니다. 그는 서른 살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프리카 가봉으로 떠나, 거기서 오십 년 넘게 환자들을 돌보다 생을 마쳤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성인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슈바이처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구주로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예수는 위대한 도덕 교사였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으로 오십 년을 버텼을까요?

그것은 행복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깊은 만족감, 세상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충만감, 그리고 그 삶이 스스로에게 돌려주는 고귀함, 그 행복은 진짜였습니다. 오십 년을 지탱할 만큼 강력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도 선한 일을 할 때 행복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행복이 클수록, 더 큰 선을 행하게 됩니다. 자선가들이 수백억을 기부하는 것도 같은 구조입니다. 그 기부가 주는 행복이 없다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선행과 기부와 헌신의 이면에서, 인간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조는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새벽기도를 꾸준히 나가면서 스스로에게 점수를 줍니다. 헌금을 드리면서 뿌듯함을 느낍니다. 봉사를 하면서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확인을 받습니다. 그 행위들이 모두 선하게 보이지만, 그 동력이 하나님이 아니라
'나'라면, 그것은 종교의 언어로 포장된 자기 사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더 교묘한 경우도 있습니다. 기복주의와 성공주의가 판치는 교회를 비판하면서, 스스로는 개혁적이고 바른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모습입니다. 그 비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비판이 어디서 오느냐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너진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저들과 다른 나'를 확인하려는 자리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바리새인의 기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 찬사였습니다.

진짜
'양의 탈'은 쉽게 드러나는 탈이 아닙니다. 완벽하게 선하고 옳아 보이는 탈입니다. 우리가 그 탈을 쓰고 있지 않은지, 먼저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율법을 지키고, 성전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를 바친다. 그러나 너희 힘으로는 안 된다. 회개하고 은혜를 의지하라." 이 말씀이 그들을 격분하게 했습니다. 왜그랬을까요? 그들이 평생 쌓아온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연구하고, 금식하고, 제사를 드리며 쌓아 올린 '나'라는 구조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체성이었고 자존심이었고 삶의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구조물의 밑동을 건드렸습니다.
"그것으로는 안 된다"는 말은 곧 "당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것은 의미 없다"는 말이었고, 그것은 그들이 가장 참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나무에 달아 죽였습니다. 논리로 이길 수 없으니 힘으로 제거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셨다." 여기서 '살리셨다'는 헬라어 '에게이로'는 단순한 부활의 선언이 아니라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세우셨다고 할 때 쓰이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즉 이 말의 뜻은 이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분이다. 너희는 너희의 '나'를 건드린다는 이유로 그분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을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

이 선언이 오늘 우리에게도 날카롭게 들려야 합니다. 만약 지금 예수님이 교회에 오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절에 가시면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은 그분의 말씀에 걸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은 저주다, 성공한 자가 승리자다'를 외치며 달리는 교회에 오셔서 "그것이 아니다"라고 하신다면, 그 말씀이 교회의 '나'를 건드린다면, 우리는 과연 그 말씀을 기쁘게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를 나무에 달아 죽인 것은 이천 년 전 유대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몇 해 전, 60년 넘게 신앙생활을 한 어떤 장로님의 임종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평생 예수를 믿었고, 전 재산을 구제와 예배당 건축에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임종 직전 그분은 가느다란 손으로 손을 붙잡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직 죽을 준비가 안 됐어요. 나 좀 살려 주세요." 60년의 신앙생활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가슴이 무너졌습니다. 성도는 죽음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망아, 문이나 열어라. 나는 이 세상에서 이미 다 털렸다. 네가 가져갈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장로님의 손은 세상을 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요? 신앙생활이
'나'를 비우는 방향이 아니라 '나'를 쌓는 방향으로 흘렀기 때문입니다. 헌금을 드리면서 드린 나를 쌓고, 봉사하면서 봉사하는 나를 쌓고,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나를 쌓습니다. 그렇게 쌓인 60년의 '나'는 죽음 앞에서 무기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잃는 것이 두려워 더 단단히 움켜쥐게 만듭니다.

성도는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붙드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숙은 내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비워지는 것입니다. 나에게 점수를 주는 순간, 은혜를 붙들지 않고 자신을 신뢰하게 됩니다.
"내가 이만큼 자랐다"고 느끼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손을 거두시면 자란 것이 없음이 금방 드러나는데, 왜 다시 주저앉는지 그것이 이미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털어내십니다. 내 옛사람을, 내 인격을, 내가 소유라고 여겼던 것들을 하나씩 가져가십니다. 그 과정에는 공식이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도 고통이 오고, 죄를 지어도 평안이 유지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등식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서 우리가 계산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그러니 견디려 하지 마십시오. 그냥 살아 있으십시오. 그것을 다 겪어내면, 하나님이 정금같이 단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네 행위와 상관없이 어떻게 끌고 가든, 너는 내가 붓는 생명력으로만 살 수 있겠느냐?"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사랑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와 무관하게,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 조건이 없는 사랑, 그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십자가는 그 사랑의 가시화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사는 거야"를 죽음으로 증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오늘도 우리 마음속에 그 사랑을 향한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선하게 살고 싶다는 그 마음,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고 싶다는 그 열망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 마음 안에서 열심히 해보십시오. 실패하면 다시 은혜로 돌아가면 됩니다. 잘되었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 보잘것없는 인간 속에서도 예수의 삶을 만들어 내는구나"라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됩니다. 나에게 점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방향이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나를 향하고, 후자는 하나님을 향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예배당으로 향하면서
'나는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냥 자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달콤한 잠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궁금하고, 그분 앞에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행복하다면, 목숨 걸고 나와야 합니다.

경외감은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이 나를 놓으시면 언제든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자각에서 옵니다. 그 자각이 있는 사람은 함부로 하나님께 삿대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왜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저를 붙들어 주십시오. 당신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라고 엎드립니다.

그 경외감이 감사를 낳고, 감사가 사랑을 낳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나라를 원합니다. 그 나라를 원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집니다. 자식보다, 재산보다, 명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목적지입니다. 당신 자신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