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도행전

마음에 무엇을 두고 사는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9.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사도행전 5:1~6)

사도행전 5장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이야기의 핵심에는 한 단어가 놓여 있다. 바로
‘마음’입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향해 이렇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느냐.” 성경은 언제나 문제의 근원을 정확히 짚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환경도, 제도도, 정보의 부족도 아닙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인 것입니다.

인간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평생 세 가지 질문을 품고 살아갑니다. 첫째, “인간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왔고, 왜 여기 있으며, 어디로 가는가, 둘째, “도대체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이렇게 불만족한가, 왜 아무리 많이 가져도 공허한가, 셋째,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의 총합이 그 사람의
세계관입니다. 세계관이란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과 나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관점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이 질문들에 대한 정답을 알지 못한 채 태어난다는 데 있습니다.

교육도, 이념도 인간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역사는 수많은 해답을 제시해 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인간은 몰라서 문제다. 교육을 시키면 나아질 것이다.” 그것이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다. 또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문제는 구조다. 사회를 바꾸면 인간도 바뀐다.” 그것이 여러 이념, 특히 공산주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이전 세대보다 훨씬 많이 배웠고, 훨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더 평안해졌는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잔인해졌고, 더 교묘해졌고, 더 흉악해졌습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범죄는 상상력을 뛰어넘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늘었지만 인간의
내면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성경은 단언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히틀러 같은 한 사람이 미쳐서 수백만 명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의 마음 자체가 그런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무기는 버튼 하나로 도시 하나의 생명체를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이 한 번 무너지면, 세상은 끝날 수도 있습니다. 인류의 근본 문제는 분명합니다. 죄인 것입니다. 죄는 행동 이전에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묻습니다. “왜 네 마음에 사탄을 두었느냐?”

성경은 사탄이 우리의
마음을 혼미케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지 복음을 못 알아듣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썩었는지, 우리가 왜 구원이 필요한지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마귀는 이 세상을 살 만한 곳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좋은 집, 좋은 차, 자녀의 성공으로 인생의 실체를 가려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정도면 괜찮은 인생”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그 가려진 곳에는 절망과 무력함이 가득합니다.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지 못하는 노인들, 대물림되는 가난과 중독, 깨진 가정들, 이것이 은혜를 떠난 인생의 실제 모습인 것입니다.

새 마음을 주셨으나,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에스겔 36장에서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리라.” 그 새 마음은 이미 성도 안에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헌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죄로 오염된 마음은 여전히 공존하며 우리를 흔듭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질문합니다. “왜 예수를 믿는데도 공허한가?” 그 질문은 실패의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헌 마음이 폭로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싸움 속에서도 새 마음이 결국 이길 것이라는 복음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엉뚱한 것들을 부러워하며 시간을 낭비합니다. 조금 더 편한 삶, 조금 더 쉬운 돈, 조금 더 인정받는 자리, 사람들은 목표 지점만 높게 설정해 놓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절망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미워하다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릅니다. 자살은 자기 사랑이 극단으로 치달은 결과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기부인도 일종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죽음입니다. 세상은 죽어가며 살고, 성도는 죽으며 살아납니다.

하나님 나라가 실제가 되면, 이 세상은 더 이상 부러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부자가 부럽지 않고, 유명인이 부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잠시 스쳐 갈 장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랑입니다. 누군가 부러워해 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을 위해 인생 전체를 소모하는 것은, 스스로를 죽이는 일입니다.

이 땅의 따뜻함은 잠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따뜻함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받은 사람들입니다. 새 마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지도 분명합니다. 엉뚱한 것을 부러워하며 스스로를 해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살라 하신 그때까지 살고, 자라라 하신 그 자리까지 자라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십시오. 이 땅에서 헛된 따뜻함을 붙잡다가
진짜 따뜻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