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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은혜만이 남을 때, 사람이 자유로워진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13.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사도행전 4:29~31)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겁 많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담대해지고, 자기 보신에 급급하던 사람이 죽음 앞에서도 진리를 말한다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묻게 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그는 하찮은 여종 앞에서조차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종교 권력자들과 성전의 치안 책임자들, 심지어 죽일 수도 있는 권세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판단하라.”

이 변화의 비밀은 단 하나입니다. 성령이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지키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명을 움켜쥐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두려움은 용기가 생겨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붙들고 있던 ‘나’가 내려놓아졌기 때문에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다가 종종 요한복음 앞에서 멈칫하게 됩니다. 마태·마가·누가복음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도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이 장면이 없습니다. 강을 건너자마자 유다가 군병들을 데리고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묻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나사렛 예수라.” “내가 그니라.” 그 순간 군병들이 물러서며 땅에 엎드러집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연약함을 감추려는 책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 왕 되심을 증언하는 복음서입니다. 600명이 넘는 군병이 한 사람을 잡으러 왔다는 사실 자체가, 세상이 그분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세상은 언제나 자기 통제가 불가능한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구약의 오순절과 신약의 오순절은 놀라운 대조를 이룹니다. 출애굽 후 50일,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졌을 때 돌판은 깨졌고, 그 날에 삼천 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오순절에는 성령이 임했고,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삼천 명이 살아났습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지만 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죄를 드러내되, 동시에 예수의 의로 살리십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아무렇게나 흘려보내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건은 구속이라는 목적을 향해 정교하게 흐릅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경륜이라 부릅니다.

수영을 처음 배울 때 가장 어려운 것은 기술이 아니라 두려움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물에 빠질까 봐 온몸에 힘을 주고 있으면 절대 뜨지 못합니다. 오히려 완전히 몸을 맡길 때, 물은 사람을 떠받칩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나 자신을 개혁하겠다고 발버둥 칠수록 우리는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속에
“나는 할 수 없다”를 인정하며 몸을 맡길 때, 그때 비로소 자유가 오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유능한 사람으로 만드는 소식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소식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도덕적이었습니다. 윤리적이었고, 종교적으로 성실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 부르셨습니다. 왜그랬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양심이라는 율법을 붙들고 자기 의를 쌓았던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 이것이 죄의 본질인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유도 같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서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 목회자는 초창기 목회 시절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너무 무서운 설교를 했습니다. 나 자신도 못 사는 설교를 성도들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때는 몰랐던 것입니다. 은혜 없이 성화를 말하면,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말씀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율법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기독교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어느 순간 “다른 종교인보다 나아 보여야 한다”는 말로 변질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번도 기독교가 세상을 도덕적으로 개선하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평생 장애인을 섬기고 모든 명예를 내려놓은 헨리 나우웬,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서 회심한 사형수가 있습니다. 만약 둘 다 예수의 의만 붙들고 천국에 갔다면, 한 사람은 큰 집, 한 사람은 판잣집에 살까요? 아닙니다. 천국에는 의의 차등이 없습니다. 오직 은혜의 동일함만 있습니다. 행위가 아니라 예수의 피가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충만하면 능력이 생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이 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성령 충만의 결과는 자기 과시가 아니라 자기 폭로입니다. 죄가 드러나고, 무력함이 인정되고, 결국 예수만 붙들게 됩니다. 그래서 성숙한 성도는 말합니다. “나는 점점 괜찮아지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없으면 하루도 못 사는 사람임을 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꾸 자신을 보배처럼 꾸미려 합니다. 교회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연약함을 숨기고, 신앙 좋은 척 연극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질그릇이 깨질수록, 그 안에 있는 보화가 드러납니다. 사람이 작아질수록, 예수는 커지는 것입니다.

신앙은 가짜
‘나’가 무너지는 여정입니다. 혼자 있을 때의 내가 진짜 나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만들어진 ‘신앙적인 나’는 가짜입니다. 신앙은 그 가짜 ‘나’가 무너지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버선발로 뛰어나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밝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증언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망가지고, 드러나고, 부끄러워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은 더 분명해집니다. 그때 사람들은 말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저 사람을 사랑하시는구나.”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것이 복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