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사도행전 4:27~28)
사도행전 4장 27~28절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이 합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는데,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이었다는 고백입니다. 인간의 배신과 폭력, 종교적 위선과 정치적 계산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들어 있었다는 이 고백은, 하나님이 역사를 어떻게 다스리시는 분이신지를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는 본문이 베드로전서 1장 18~21절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알리셨다”는 표현은 단순한 예지나 정보 전달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알다’는 말은 사랑하여 택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택함을 받은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그렇게 택함을 받으셨는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으로 제물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은 충격적이지만 분명합니다.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십자가는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창세 전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계획을 뒤엎어 급히 마련된 대안이 십자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죄도, 구속도, 십자가도 모두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성경을 이해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다. 그러면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이 급히 계획을 수정하셔서 예수를 보내셨고, 그 결과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때가 찼다”, “때가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이 ‘때’는 인간의 시간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대, 곧 영원 속에서 정해진 때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도 이 ‘때’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초막절에 예수님의 형제들은 말합니다. “형, 여기 있지 말고 올라가서 기적을 보여줘. 그래야 일이 잘 되지.” 그러나 예수님은 거절하십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그리고 형제들이 먼저 올라간 뒤, 예수님은 조용히 성전에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은 효율이나 인기, 인간적 계산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이 땅에 들어오는 순간에만 움직이셨습니다.
우리는 시간 속을 살고 있지만, 사실 우리의 삶은 영원 속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경험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주기도문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는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세계에는 과거와 미래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원한 현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역사가 다르게 보입니다. 마치 아마존 강을 따라 서로 다른 날에 출발한 카누들이 각자 자기 위치에서는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높은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모두 한눈에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각자의 시간 속에서 허덕이지만, 하나님은 모든 시대와 모든 인간을 동시에 보십니다. 선악과 사건이 하나님의 계획 밖에서 갑자기 튀어나왔을 리도 없고, 십자가가 인간의 실수 때문에 급조된 사건일 리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이미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있었습니다.
다시 사도행전 본문으로 돌아가면, 헤롯과 빌라도,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였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죄를 정당화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폭로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봐라. 은혜를 떠나면 인간은 여기까지 간다. 그래도 나를 떠날 수 있겠느냐?”
이 원리는 오늘의 세상에서도 반복됩니다. 극소수는 넘칠 정도로 쌓아두고, 다수는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갑니다. 곡식은 창고에서 썩거나 바다에 버려지고, 한쪽에서는 굶어 죽습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였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받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집니다. 말씀을 모르는 성도들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지도자들이 만나 만들어내는 비극은 결국 “하나님이 없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세상에 증명해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타락과 추함은 단순한 절망의 증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은혜가 없으면 인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그리고 그 죄를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대가를 치르셨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우리를 백성 삼으신 하나님의 손해, 그 엄청난 희생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저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 역시 언제든지 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돈과 권력, 욕망 앞에서 인간은 결코 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쌓아두지 말고 흘려보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노후 대책이고 사후 대책이 되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 속에 있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동시에 방종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이끌어 가실 인생이라면, 불쌍한 이를 돕고, 맡겨진 것을 나누며, 청지기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길인 것입니다. 움켜쥐고 썩게 만드는 삶이나, 흘려보내며 사는 삶이나 결국 하루 세 끼는 같습니다. 그러나 그 삶의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는 은혜의 틀입니다. 이미 준비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오늘도 배웁니다. 은혜 안에 머물러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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