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사도행전 4:23~28)
사도행전 4장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기도는 놀랍습니다. 사도들이 풀려난 직후, 그들은 상황을 분석하거나 대책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대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은 우리의 예상과 다릅니다.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박해자를 심판해 달라고 외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시편 2편을 끌어와 이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큰 이야기 안에서 읽어냅니다.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다.” 초대교회는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까지 모두 등장하는 이 사건을 우연이나 인간의 악의 폭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이미 말씀 속에 예고된 일이며,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편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헤롯과 빌라도는 무슨 죄인가? 하나님이 그렇게 쓰신 것이라면, 그들은 이용당한 것인가?” 이 질문은 사실 무척 종교적이고도 인간 중심적인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의 밑바닥에는 이런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예수의 손에 못을 박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한 일은 단 하나, 예수를 제거해도 된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보다 약한 존재였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방해하는 존재였다면, 우리는 그분을 제거하려 들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힘의 차이일 뿐, 마음의 방향은 동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합니다. 돈이 더 중요하고, 건강이 더 소중하고, 가족과 자식이 하나님보다 앞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흔드실 때 우리는 불평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잠시 맡겨주신 소품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으로 자아를 살찌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헤롯과 빌라도는 하나님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소품이었습니다. 그들은 잠시 왕처럼 살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50~60년 잘 먹고 잘 살고, 그 대가로 영원을 잃는 삶이었습니다. 과연 그것이 부러운 인생입니까? 성도는 이 땅에서 훈련받는 존재입니다. 마치 혹독한 연수를 견디는 사람처럼, 하나님 나라는 그냥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배우며 살아가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내 중심으로 신앙을 재편합니다. 하나님을 배우고 그분의 나라를 알아가야 하는데, 우리는 이 땅에서의 유토피아를 꿈꿉니다. 토머스 모어가 그렸던 유토피아처럼, 아직 오지 않은 이상향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나라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나라에 합당한 눈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말씀이 실종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착하게 살자”, “복 받자”, “병 고치자”라는 값싼 종교 구호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며, 모두가 열심히 지옥을 향해 달려갑니다. 우리는 자주 묻습니다. “왜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정작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대화인데, 우리는 일방적으로 요구만 늘어놓고 자리를 뜹니다. 그래서 기도는 점점 짧아지고, 신앙은 점점 얕아집니다.
초대교회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들은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말씀을 기억하고, 사건을 말씀 안에서 해석합니다. 시편 2편이 지금 이 현실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말씀을 모르면 기도도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 말씀을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 속에 흐르는 묵시를 읽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과거 기록이 아닙니다. 실제 역사이지만, 동시에 영원을 관통하는 묵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의 나를 폭로합니다. 이천 년 전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바리새인이었다면, 오늘 예수가 다시 오신다면 누가 그분을 죽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교회가 죽일 것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예수상이 아니라고 그분을 밀어낼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이 어떻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 부인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리는 하나님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유대주의와 다를 바 없습니다. 행위로 보상받으려는 신앙은 결국 하나님을 죽이는 신앙인 것입니다.
탕자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버지, 유산을 미리 주세요”라는 말은 “아버지, 죽어주세요”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 주시겠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달라고 떼씁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는 관심 없습니다.
기도 시간은 말보다 들음이 더 많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요구가 아니라 연합입니다.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흘러가는지, 하나님이 어떤 계획 속에서 우리를 이끄시는지 들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살기 시작합니다. 삶을 업그레이드하려는 신앙은 결국 지옥을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청소를 해도, 서빙을 해도, 그 자리는 천국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자체가 이미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생명처럼 여기는 그것을 하나씩 내려놓을 용기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더 알고 싶다는 갈망이 있습니까? 성경을 통해 그분의 마음을 배우고, 역사 속에서 묵시를 읽어낼 눈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헤롯과 빌라도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질문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가 아니라, “나는 지금 누구의 편에 서 있습니까?”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다시 말씀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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