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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2. 16.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사도행전 4:13~22)

사도행전은 이야기책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이야기책이 아니라 사건의 책입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겪었고, 실제로 일어났으며, 실제로 생명을 걸었던 사건들로 점철된 기록입니다. 본문 마지막에 굳이 이런 말이 덧붙여집니“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왜 하필 나이까지 기록했을까요? 그것은 이 이야기가 교훈을 주기 위해 꾸며낸 종교적 우화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한 사람의 삶과 몸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신앙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상상력이 아니라, 역사 속에 침투한 하나님의 개입을 증언하는 책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모습의 베드로와 요한을 만납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예수를 죽였던 바로 그 권력자들 앞에서 기탄없이 말합니다. 그러나 불과 6주 전만 해도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를 저주하며 부인했고, 제자들은 모두 흩어져 도망쳤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고,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까지 확인하고도 그들은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인간은 언제나 안전한 곳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6주 만에 이 사람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목숨을 걸고 말합니다. “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무엇이 이들을 바꾸었을까요? 오직 하나입니다.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목적이 바뀝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 제자들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다윗 왕국의 회복, 자리, 권력, 성공, 그래서 죽음이 두려웠고, 십자가 앞에서 모두 떠났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후, 그들의 목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더 오래 사는 것, 더 안전한 삶,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망 앞에서 사망을 조롱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지점에서 질문은 우리에게로 돌아옵니다. 정말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셨는가? 그런데 우리의 기도의 중심은 여전히 무엇인가? 병에 안 걸리는 것, 오래 사는 것, 자녀의 성공, 안정된 삶, 내 문제의 해결, 이것이 성령이 임하기 전 제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만일 우리의 목적이 여전히 이 세상에서의 안전과 성공이라면, 우리는 복음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종교를 사용하는 사람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진짜 복음은 사람을 즉시 바꿉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들으면 삶이 바뀌었습니다. 카타콤에서 수백만 명이 죽어갔습니다. 햇빛을 보지 못해 키는 자라지 못했고, 질병이 만연한 무덤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자식과 손자까지도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을 밀ㄹ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에게 복음은 “
삶이 좀 나아지는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죽음보다 더 확실한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유로운 나라에서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자유가 신앙을 가장 약하게 만듭니다. 풍요는 사람을 살찌우지만, 동시에 영혼을 무디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
예수 믿기 힘들어요.” 그러나 사실은 너무 편해서 힘든 것입니다. 북한의 성도들은 “주여”라는 한마디에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는 수많은 말로 기도를 채우면서도, 정작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한 몸이라면, 이 차이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단순한 반항이 아닙니다. “
판단하라.” 이 말은 헬라어 원문에서 “너희가 결정하라.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대답할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신앙은 중립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든지, 사람의 말을 듣든지 선택해야 합니다.

복음은 내가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복음의 출발점은 이것입니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나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 은혜는 보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이제 구원받았으니, 내가 뭔가 해보겠다.” 이 순간, 복음은 율법으로 변질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질그릇이고, 그 안에 담긴 예수가 보배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정반대로 삽니다. 내가 보배이고, 예수는 내가 필요할 때 사용하는 도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변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지식에 머물고, 삶은 그대로입니다.

신앙은 다이나믹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기독교는 교양 과목이 아닙니다. 예수를 “
믿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붙들고, 우리를 믿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폭로당합니다. 내가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하나님 은혜 없이는 설 수 없는 존재인지, 그때 비로소 나는 질그릇이 되고, 예수는 보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들은 확신이 있었기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조금이라도 “
나중에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의심이 있었다면 그들은 결코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즉시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고, 목숨의 주인을 바꿉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정말 그 복음 위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성령이 임하기 전 제자들의 자리에서 안전한 갈릴리를 향해 돌아가고 있습니까? “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 고백이 다시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