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사도행전 4:29~33)
사람은 위협 앞에서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려 합니다. 말수를 줄이고, 눈에 띄지 않게 살며, 괜히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4장의 초대교회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인 권세자들 앞에서 풀려난 뒤, 두려움에 떨며 숨어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함께 모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놀랍습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우리의 상식을 깨뜨립니다.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그들은 안전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위협을 제거해 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말씀만은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전하면 죽이겠다’는 협박을 들은 사람들이, ‘그래도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기도가 끝났을 때, 그 자리에 모인 곳이 진동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렇게 기록됩니다.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그들이 전한 말씀의 핵심은 분명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우리는 흔히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약성경은 집요할 정도로 부활을 강조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거의 한 장 전체가 부활 이야기입니다. 왜일까요? 기독교 역사 2천 년 동안 가장 공격받은 교리는 단연 부활입니다. 어떤 이는 무덤의 환경을 따지며 시신이 분해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제자들이 시신을 훔쳤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신학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중에도 부활은 상징일 뿐 실제 사건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만 던져보면 이런 주장은 힘을 잃습니다. 거짓말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이 있습니까? 제자들은 부활을 전하다가 매 맞고, 감옥에 갇히고, 결국 순교했습니다. 자신들이 꾸며낸 이야기라면, 어느 지점에서는 멈췄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은 실제로 죽임당한 예수가 살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기독교는 단순한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부활 신앙은 세상을 실제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병원이 생기고, 학교가 세워지고, 가난한 자를 돌보는 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많은 ‘당연한 가치’들은 부활 신앙에서 흘러나온 열매인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교회는 그 영향력을 많이 잃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 곧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여전히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이 미치는 영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지구 반대편에 폭풍이 일어난다는 ‘나비 효과’처럼, 한 성도의 신실한 삶은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수 있습니다. D. L. 무디는 이름 없는 구둣방 주인의 진실한 신앙을 통해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 한 사람의 순종이 수많은 영혼을 살렸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사이, 네 삶을 통해 내가 많은 일을 했다.”
세상은 ‘착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착한 일은 기분이 좋습니다. 손해를 보아도 스스로 만족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선함’은 다릅니다. 선한 일은 때로 고통스럽습니다. 자아가 무너지고, 내가 의지하던 것이 끊어지고, 내 안의 의가 부인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착한 일을 하며 그것을 자신의 의로 쌓아 둡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선한 일은 오직 복음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죄와 은혜를 분명히 아는 사람, 자기 안에 선이 없음을 인정한 사람 안에서만 예수님의 긍휼이 흘러나옵니다. 그때 행해지는 선은 더 이상 자랑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내 안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단지 ‘죽은 뒤 천국 가는 티켓’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죄, 육신, 세상, 율법으로부터 구원한 사건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주는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면 반드시 사망을 이기셔야 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받아야 할 죽음을 대신 짊어지셨고, 그 죽음의 반대편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죽은 흙과 같던 존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부활이 없다면 복음도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의 미래는 무엇이 보장해 주는가?” 많은 사람들은 돈이라고 대답합니다. 노후 준비, 은퇴 계획, 투자와 자산, 그러나 돈은 보이지 않는 신입니다. 약속하는 것 같지만, 결국 불안을 더 키웁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단단해집니다. 하루가 길게 느껴질 때도 있고, 세상이 점점 더 공허하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부활을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진짜 삶은 그 이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가치에 과도하게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을 깊이 묵상할수록, 우리는 담대해집니다. 초대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편안하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말씀만은 전하게 하옵소서”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활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본 사람은, 혹은 믿음으로 본 사람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습니다. 그 담대함이 오늘도 세상을 흔들 것입니다.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은 지금,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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