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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복음이 사람 사이의 담을 무너뜨릴 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20.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사도행전 4:32~37)

사도행전 4장 후반부는 초대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자주 인용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 구절을 읽으면 누구나 잠시 이상적인 공동체를 상상하게 됩니다. 다툼도 없고, 경쟁도 없고, 가진 자가 자발적으로 나누어 가난한 자가 사라진 공동체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묻습니다. “저런 교회가 오늘날에도 가능할까?” 그러나 이 장면은 공중에 뜬 이상향이 아닙니다. 이 유무상통의 공동체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어떤 제도나 규칙으로 강제된 것도 아닙니다. 그 출발점은 기도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고친 후, 종교 권력으로부터 심각한 위협과 경고를 받게 됩니다.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 공동체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선택한 반응은 의외입니다. 안전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핍박이 사라지게 해달라고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드린 기도는 이것이었습니다. “주여,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

기도 후, 그들이 모인 곳이 진동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표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진동을 문자적으로 재현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믿음의 시대입니다. 보이는 표적 없이도 보이지 않는 실체를 붙드는 시대입니다. 그때는 성경이 완성되기 전, 하나님이 자신의 계시를 확증하시던 시기였습니다. 그 진동 이후, 그들 안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기적이 아니라 확신이었습니다. 말씀에서 오는 확신이 사람을 담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담대함은 결국 삶의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유무상통은 제도가 아니라 열매입니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며 종종
“초대교회는 원시 공산주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공산주의는 강제와 폭력, 체제를 통한 평등입니다. 반면 초대교회의 나눔은 복음에 의해 생겨난 자발적 열매였습니다. 누가 “밭을 팔아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헌금을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소유를 내려놓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더 이상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구브로 출신 레위인 요셉, 곧 바나바는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둡니다. 여기에는 어떤 영웅적 결단의 과장도 없습니다. 복음을 제대로 알게 되면, 소유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됩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움켜쥘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막힌 담을 허무셨다”고 말합니다. 성전에는 실제로 담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를 가로막던 담입니다. 그 담을 넘으면 사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 담이 무너졌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종교적 화해를 뜻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개 취급하던 관계조차 복음 안에서는 하나가 된다”는 선언입니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결국 내가 중심이 되려는 욕망에서 나옵니다. 인간은 지성과 교양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교양 있는 사람들의 싸움은 더 정교하고 더 잔인합니다. 말 대신 침묵으로, 주먹 대신 제도로 사람을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비슷한 수준의 사람과 싸웁니다. 나보다 훨씬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는 사람은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는 험담이 끊이지 않습니다. 상대를 끌어내려야 내가 안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구조 자체를 깨뜨립니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다.” 이 고백이 진짜가 될 때, 경쟁은 멈추게 됩니다.

부부 싸움을 보면 인간의 본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서로의 아킬레스건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끝까지 갑니다. 작은 말다툼으로 시작했는데, 결국 상대의 가장 깊은 상처를 찌르고 맙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나는 너 앞에 굴복할 수 없다.” 이것이 아담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정말로
“나는 흙이다”,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고백에 이르면 달라집니다. 상대의 공격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 맞아. 그게 나야.” 그때부터 상대는 적이 아니라 섬김의 대상이 됩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습니다. 신앙은 순간이 아니라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이 아름다운 장면만 보면 초대교회는 천국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서신서를 읽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근친상간, 계급 차별, 가난한 자에 대한 멸시, 술 취한 예배…. 초대교회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충격적인 문제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그들의 유무상통을 숨기지 않고 기록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것이 너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는 여전히 이 모양이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답은 하나입니다. 복음을 더 배우는 것, 예수의 은혜를 더 붙드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구호단체와 종교 단체들이 왜 결국 유혹에 빠질까요? 처음부터 사기치려고 모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다 좋은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 권력과 돈 앞에서 버틸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너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신앙생활은 내 것을 털어내어 남을 섬기는 방향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더 주세요”라고 응석을 부립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깊이를 알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사랑의 편지라 말하면서도, 실제 관심은
“내 문제가 해결되느냐”에만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종교 소비입니다. 진짜 기독교는 하나님을 알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며,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여정입니다. 이 땅에서 소원을 이루는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를 듣고 불안해집니다.
“이대로 죽으면 지옥 가는 것 같아요.” 그 불안은 은혜의 시작입니다. 진짜 기독교인은 자기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지 깨닫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50년을 착하게 살아도 해결되지 않던 죄책감은, 더 착해져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의 은혜를 배울 때만 사라집니다.

우리는 마음까지 통제할 수 없습니다. 미움, 욕심, 음욕은 계속 올라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는 하나입니다.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그 기도를 붙들고 포도나무이신 예수께 꼭 붙어 있을 때,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힙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4장의 공동체가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 완성을 향해, 은혜를 배우며 걸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