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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진동 속에서 드러나는 은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27.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사도행전 5:31~33)

사도행전 4장을 읽다 보면 이상한 장면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했을 뿐인데, 모인 곳이 진동했다는 기록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기도의 응답으로 ‘평안’이나 ‘위로’가 아니라, 진동이 나타났고, 그 결과가 은혜였습니다. 이 대목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신앙의 이미지와 어딘가 어긋납니다. 우리는 보통 은혜를 부드러운 것으로, 진동은 두려운 것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둘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는 종종 진동의 형태로 임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진동’은 우연한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가까이 임하실 때 나타나는 표지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시내산입니다.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출 19:18)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자 산이 흔들렸습니다. 이 진동은 죄인들에게는 공포였고, 심판의 전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언약으로 택하신 백성에게는 두려움 속에서도 구원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가 드러납니다. 진동 그 자체가 심판이냐 은혜냐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 진동 앞에 선 사람이 누구인가가 그것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지옥을 이야기할 때 자주 오해합니다. 마치 사탄이 지옥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지옥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사탄은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심판받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지옥의 불은 무엇입니까? 그 불은 하나님과 무관한 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 불입니다. 문제는 불이 아니라, 그 불을 맞이하는 존재의 상태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천국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췸이라” 천국에도 불이 있습니다. 빛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빛은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이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소멸의 불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빛을 감당할 수 없는 어둠은, 그 빛 앞에서 고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시골에서 묘지를 이장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둡고 습한 관 속, 썩지 않은 시신 주변을 새카맣게 뒤덮고 있던 벌레들, 삽으로 아무리 건드려도 도망가지 않던 그것들이, 햇빛이 쏟아지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빛이 들어오자, 어둠은 버틸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적 원리입니다. 어둠은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빛 앞에서 무너집니다. 그래서 성령의 불이 임할 때, 그 불을 믿음으로 품는 자에게는 정결과 생명이 되고, 그 불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고통과 심판이 됩니다. 결국 지옥도, 천국도, 같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다만 그것을 은혜로 받느냐, 형벌로 받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히브리서는 진동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을 나타내심이니라” 하나님은 무작정 부수기 위해 흔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붙들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분시키기 위해 흔드십니다. 초대교회가 기도하던 그 집을 진동시키신 이유도 같습니다. 세상의 권세가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진동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흔드는 것처럼 보이는 저 권세자들, 결국 흔들려 무너질 것은 그들이다. 너희는 진동치 않는 나라에 속해 있다.” 그래서 그 진동은 그들에게 은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평탄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오히려 믿음의 길에 들어선 이후, 삶은 더 자주 흔들립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징계하십니다. 징계받지 않는 자는 아들이 아니라 사생아라고까지 말합니다. 이 말은 잔인한 선언이 아니라, 역설적인 위로입니다. 흔들림이 있다는 것은, 버려졌다는 증거가 아니라 붙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에서 너무 잘 나가고, 아무 흔들림 없이 살다가 곱게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도 그것을 보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흔드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진동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성도는 이 땅에서 미리 흔들립니다. 돈을 붙들면 돈이 흔들리고, 자식을 붙들면 자식이 흔들리고, 명예를 붙들면 명예가 무너집니다. 그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거 아니다. 그거 붙들고 살라고 너를 부른 게 아니다.”

삶이 무너질 때, 이상하게도 그제야 말씀이 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붙들고 있던 것이 떨어져 나간 뒤에야, 그동안 가려져 있던 하나님의 은혜가 선명해집니다. 설교를 오래, 깊게 해도 어떤 이는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반면 어떤 이는 통곡합니다.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학의 문제도 아닙니다. 들을 귀가 열렸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 귀는 흔들림 속에서 열립니다.

복음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은 우리를 철저히 무너뜨립니다.
“나는 왜 이렇게 연약한가, 왜 이렇게 두려운가, 왜 이렇게 무능한가.” 이 질문 앞에서 무너진 사람만이, 그 모든 것을 덮고 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웁니다. 그래서 복음은 늘 진동과 함께 옵니다. 그리고 그 진동 속에서 살아남은 것, 아니, 살아남게 하신 것,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흔드실 때, 그분은 파괴자가 아니라 구분자로 일하십니다. 무너질 것은 무너뜨리고, 남아야 할 것만 남기십니다. 그러므로 진동 앞에서 도망치지 마십시오. 그 속에 숨은 은혜를 붙드십시오.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말씀 앞에서 흔들리고, 삶 속에서 진동을 경험할 때,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는 자리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구구절절 성경 속에 숨어 계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십시오. 그분만이 진동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유일한 반석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