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사도행전 4:36~5:6)
사도행전 4장과 5장은 한 호흡으로 읽어야 할 본문입니다. 초대교회의 감격적인 공동체 모습이 펼쳐지다가, 마치 숨이 막힐 듯한 사건이 갑작스레 등장합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 사람 요셉, 곧 바나바가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는 장면과, 이어서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의도적으로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배치되어 있습니다.
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입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사도들이 붙여준 별명으로, ‘권위자’ 혹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공동체를 위해 내놓았습니다. 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똑같이 소유를 팔아 헌금했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두 사건은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둘을 극명하게 대조합니다.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헌금을 강요하는 규정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모든 재산을 다 내놓아야만 교인이 된다’는 율법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땅이 있을 때도 그들의 것이었고, 판 후에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일부를 감추고도 “이것이 전부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는 즉각적인 죽음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큰 당혹감을 줍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하시는가?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비슷한 질문은 구약에서도 반복됩니다. 여리고 성 함락 이후, 아간이 전리품을 숨겼을 때 하나님은 그와 그의 가족, 심지어 짐승들까지 돌로 쳐 죽이게 하십니다. 또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가던 길에서 “대머리야 올라가라”는 조롱을 받았을 때, 곰 둘이 나와 아이들을 찢어 죽이는 사건도 있습니다. 선지자가 받은 능력으로 행한 첫 일이 이런 심판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 모든 사건의 공통점은 ‘장소’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가 선포된 자리입니다. 초대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단순한 종교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현현입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다스리시는 공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전적으로 은혜로만 유지되는 나라입니다. 인간의 수고, 계산, 대비책이 필요 없는 나라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를 몸으로 배웠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터져 나온 물, 닳지 않는 옷과 신발, 그들의 생존은 철저히 하나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망치 한 번 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너희의 미래는 내가 책임진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래서 첫 성의 전리품은 모두 하나님께 드려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간은 조금을 감추었습니다.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만으로는 불안했던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같습니다. 문제는 ‘조금 남겼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긴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숨긴 채 자신을 의롭게 포장하려 한 태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이 항상 성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함께 계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만 걸어둔 공간이 아니라, 그분의 통치가 선포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교회 안의 거짓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에 앉아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 없이 살기를 원합니다. 돈, 자녀, 명예, 안정이 우리의 실제 신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지 않은 채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아간의 모습이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모습인 것입니다.
만약 초대교회 때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이 오늘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신다면, 살아남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상급’을 묻습니다. 그러나 상급을 경쟁처럼 생각하는 순간, 이미 복음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천국에서 더 잘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이 땅의 욕망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상급은 업적의 보상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옛 사람이 죽고,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빚어지는 과정 자체가 상급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부활한 몸으로 완성된 예수의 형상을 입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나님 나라 자체가 우리의 유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십니다. 하나님보다 더 좋은 상이 어디 있는가?
율법주의는 언제나 ‘더 나은 나’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쉽게 나타납니다. 복장, 행위, 봉사, 헌신을 기준으로 서로를 재단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교회는 자유의 공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그 자유를 누리는 곳입니다. 경건해 보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오히려 아버지 앞에 선 자녀처럼 솔직하고 자유하십시오. 그 자리에서 우리의 약함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십시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는 우리를 두렵게 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을 폭로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교회는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꾸 부인당하며, 하나님의 은혜만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뛰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나는 삶.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당신만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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