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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마태복음

마태복음 - 골방에서 만난 아버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1.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5~8)

한 마을에 유명한 배우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대에 설 때마다 관객의 박수갈채를 받는 것에 삶의 의미를 두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병에 걸려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자, 그는 병실에서도 간호사와 방문객들 앞에서 연기하듯 신음하고, 고통을 과장되게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짜 아픔보다 "
얼마나 힘들어 보이는가"가 더 중요해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진짜 치료가 필요할 때조차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정직하게 자신의 상태를 말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꼭 이랬습니다. 그들은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자세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장이 분향할 때 유대인들이 밖에서 서서 기도하는 것은 오래된 관습이었습니다. 문제는 장소와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배우가 무대를 고르듯, 사람들이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리를 골라 그 자리에서 신앙의 연기를 펼쳤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냉정하게 말씀하십니다. "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다 받았느니라." 관객의 박수가 그들이 원한 전부였고, 그들은 이미 그것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받을 것은 더 이상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무대 기도와 정반대의 그림을 제시하십니다. "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골방은 창고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방입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기도는 반드시 골방에서만 해야 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은 장소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관객을 향한 기도에서 아버지를 향한 기도로, 시선의 방향을 완전히 돌리라는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와 어린 딸의 이야기입니다. 딸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쓸 때, 이웃들에게 보여주려고 예쁜 문장을 골라 쓰는 딸은 없습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문법이 틀려도,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적어 아버지에게만 건넵니다. 그 편지는 다른 누구의 평가도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가 읽고 알아준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합니다. 골방의 기도란 이런 것입니다. 사람의 평가가 끼어들 자리가 없는, 오직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은밀한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잘못된 기도, 곧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지적하십니다. 열왕기상 18장에는 바알 선지자들이 갈멜산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소리 지르고 몸에 상처를 내면서 자기 신을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정성이 클수록, 말이 많을수록 신이 감동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치 자판기에 동전을 넣듯, 충분한 말의 양을 채우면 응답이 나온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은 풍경입니다. 간절함을 증명하려고 같은 간구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며, 말의 분량과 강도로 하나님을 움직이려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판기가 아니십니다. 사람의 정성에 반응하여 움직이시는 신이 아니라, 이미 아버지로서 자녀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질문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사람 없는 골방에서, 중언부언하지 않고 짧고 진실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는가? 이 설교가 던지는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답은 "
아니다"입니다. 인간은 기도의 매너를 고친다고 해서 올바른 기도자가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분명히 말합니다.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잠 15:29). 그런데 성경은 또한 선언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이 두 구절을 나란히 놓으면 절망적인 결론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기도만 들으시는데, 이 땅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기도도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다는 뜻입니까?

어느 재판정을 상상해 봅니다. 죄를 지은 피고인이 아무리 정중한 말투로, 아무리 논리 정연하게 자기 변론을 펼쳐도, 그 변론 자체는 무죄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말투를 고친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기도의 형식을 고친다고 죄인이 의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 재판정에서 피고인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미 무죄 판결을 받은 어떤 분이 자기 이름으로 대신 변호에 나서 주는 것뿐입니다.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반복된 실패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지만 이스라엘은 계속 무너졌습니다. 그것이 죄인의 실상입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의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에, 하나님은 하늘에서 친히 내려오셔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참된 의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잠언 15장 29절이 말하는 "
의인의 기도"는 결국 예수님의 기도 한 분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무의미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서 복음의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신원 미상의 사람이 왕의 아들과 양자 결연을 맺어, 이제 왕자의 이름으로 왕궁에 출입할 수 있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 자신에게는 아무 자격이 없지만, 왕자의 이름이 그 사람을 왕 앞으로 데려갑니다. 우리가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끝에 이름 하나를 덧붙이는 주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만을 근거로 삼아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고백입니다.

로마서 8장과 히브리서는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은 우리 기도의 완성도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품어 아버지께 올려 드리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기도의 참모습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러납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는 간구가 아니라, 자기 뜻을 내려놓는 항복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기도를 나의 소원 목록을 하나님께 제출하는 시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설교가 말하는 기도는 정반대입니다. 기도는 내 욕심과 자존심을 십자가 앞에 무릎 꿇리는 시간입니다. 마치 전쟁에서 패한 장수가 적장 앞에 무기를 내려놓듯,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계획을 내려놓고 이미 언약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뜻과 영광 앞에 엎드립니다.

그러므로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는 것은 결국 이런 의미입니다. 세상의 시선과 나 자신의 욕심이라는 두 개의 문을 함께 닫아버리고, 오직 아버지 앞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엎드리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