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 말씀 묵상/마태복음

마태복음 - 원수를 이웃으로 품으신 사랑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1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43~48)

몇 해 전, 한 교회 공동체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오랫동안 사업을 함께 했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동업이 깨지면서 한쪽이 상대방을 고소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명예와 재산이 크게 상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소송은 끝났지만, 마음의 담은 더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 소송에서 이긴 쪽이 뜻밖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상대방이 암 투병 중이라는 소식과 함께,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사연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모른 척해도 아무도 뭐라 안 해." 그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이웃은 도와도, 원수까지 도울 의무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결국 병원비를 대신 내주었습니다. 이유를 묻는 이에게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이미 그렇게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 오늘 본문의 핵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여섯 가지 주제를 다루시며 "
옛 사람에게 말한 바"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쓰십니다.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웃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43절)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레위기의 이웃 사랑 계명은 받아들이면서도, 원수는 미워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심지어 시편의 여러 구절들인 원수를 향한 강렬한 미움의 언어들을 근거로 삼았습니다. 얼핏 보면 신앙적으로 타당해 보입니다. "
내 편은 사랑하고, 나를 해치는 자는 경계한다." 이것은 사실 인간 사회 어디서나 통용되는 자연스러운 법칙입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심지어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선을 긋습니다. "이 사람은 내 사람, 저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익숙한 경계선을 완전히 지워버리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4절) 이것은 단순히 "더 착하게 살라"는 도덕적 권면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품 자체를 근거로 드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45절). 하나님은 땅 위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십니다. 자격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것은 인간이 계산기로 사랑을 재는 방식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46절). 세리도, 이방인도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잘합니다. 그것은 특별한 사랑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입니다. 진짜 문제는 "누가 내 이웃인가"를 좁게 규정하고, 그 밖의 사람은 미워해도 괜찮다고 여기는 그 이분법 자체에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더 선명하게 이해하려면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함께 봐야 합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이 되물으시자 그는 정확한 답을 내놓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자 그는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질문 자체가 인간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그는 사랑해야 할 이웃의 목록을 먼저 정해두고, 그 목록 안에 있는 사람만 책임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부고를 받고도 "
저 사람은 나와 무슨 관계였지?"부터 따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답 대신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이 지나갔지만 피해 갔습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상처를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까지 데려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질문을 뒤집으십니다. "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가 처음 던진 질문은 "내 이웃이 누구인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네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줄 것인가"였습니다. 이웃은 내가 골라서 사랑을 나눠주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먼저 다가가 되어주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능한 사람이 있을까요?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냉정히 말해 인간은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일을 실제로 행하신 단 한 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십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롬 5:8, 10)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은 이들을 향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분은 원수를 미워하지 않으시고, 원수의 자리까지 내려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셨습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분이 먼저 담을 헐고 다가오신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병원비를 대신 내준 사람의 고백을 다시 떠올려보십시오. "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이미 그렇게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원수 사랑의 진짜 동력입니다. 우리 안에 없는 사랑을 억지로 짜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말씀의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절). 이 말씀을 우리 힘으로 이루어야 할 도덕적 목표로 받아들이면 절망밖에 남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처럼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명령이면서 동시에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온전함을 친히 이루셨고, 이제 그 온전함을 죄인이었던, 원수였던 우리에게 덧입혀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그런 능력이 자라서가 아니라, 이미 완전하게 사랑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조금씩 되비추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원수처럼 느껴지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를 사랑할 힘을 자신에게서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대신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먼저 우리의 이웃이 되어 주신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 사랑을 아는 만큼, 우리도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