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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마태복음

마태복음 - 왼뺨을 내미는 용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14.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태복음 5:38~42)

한 중소기업에서 오래 일한 김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후배 직원이 그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가져다가 자기 성과로 포장해 승진을 했습니다. 김 집사님은 몇 달 동안 밤잠을 설쳤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후배의 행실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가 받은 만큼 돌려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그렇게 정당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습니다. 당한 만큼 갚아주는 것이 공평이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런 순간을 만납니다. 그리고 성경 어딘가에서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을 발견하면 속으로 반갑기까지 합니다. 마침내 내 억울함을 정당화해 줄 말씀을 찾은 것 같아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을 읽는 방식의 위험한 습성입니다. 우리는 본문 전체가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한 한 구절만 오려내어 마음에 붙여 놓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그 본문을 다시 만나면, 이미 밑줄 그어 놓은 그 한 줄만 눈에 들어와서 결코 그 생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로 돌아가서 이 말씀이 원래 어떤 맥락에서 주어졌는지를 살펴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타납니다.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규정은 개인이 상대에게 직접 앙갚음하라는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재판장이 법정에서 내리는 판결의 기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법의 목적은 복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수를 막는 데 있었습니다. 사람이 사적으로 보복하면 반드시 도가 지나치게 됩니다. 뺨 한 대 맞은 것을 목숨으로 갚으려 드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해진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재판장을 통해서만 정의가 실현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결정적인 질문이 나옵니다. 그 재판장에게 법을 준 분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재판장은 하나님이 세우신 대행자일 뿐, 실제로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고 심판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스스로 복수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은근슬쩍 재판장의 자리, 곧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를 앉히는 것과 같습니다. 김 집사님이 후배를 향해 품었던 그 정당한 듯한 분노 속에도, 사실은 "
내가 심판자가 되겠다"는 무서운 욕망이 숨어 있었던 셈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인간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존재, 자기 삶의 작은 왕좌에 앉은 신이 되어버렸습니다. 창세기 4장의 라멕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에게 작은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칠십칠 배로 갚아주겠다고 노래했습니다. 이것이 죄에 사로잡힌 인간의 실체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라멕의 그 계산기가 늘 작동하고 있습니다. 당한 것보다 조금 더 갚아줘야 속이 시원하다고 느끼는 그 마음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법의 본질을 밝히시며 말씀하십니다. "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어주고, 오 리를 억지로 가게 하면 십 리를 동행하고,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참으라"는 수준이 아닙니다. 상대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내어주라는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여기서 오른뺨을 맞는다는 것은 손등으로 맞거나 뒤에서 맞는 상황, 곧 모욕을 당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겉옷은 당시 사람들에게 밤에 덮고 자는 이불이자 생계의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그것까지 내어주라는 것은 자존심은 물론 생존의 최후 방어선까지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죄인인 우리에게 가능한 일일까요? 솔직히 불가능합니다. 김 집사님이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후배에게 웃으며 겉옷까지 벗어주는 심정이 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완전하게 드러난 곳이 딱 한 곳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모욕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옷까지 벗기우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심판자의 자리에 앉지 않으시고 오히려 "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하셨습니다. 산상수훈 초두에서 선포하신 천국의 모습이 십자가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이 불가능한 명령 앞에 설 수 있습니까? 답은 우리의 결심이나 노력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
너도 이렇게 살아라"라고 강요하는 새로운 율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오히려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하나는 우리가 얼마나 깊이 보복의 죄성에 사로잡힌 존재인지를 고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미 온전한 대속을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김 집사님이 정말로 자유로워지는 길은 억지로 분노를 억누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 12:19)고 말씀하신 하나님께, 그 재판장의 자리를 온전히 돌려드리는 데 있습니다. 내가 심판자가 되기를 포기하는 순간, 비로소 원수를 위해 축복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바울의 권면이 조금씩 현실이 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라멕의 계산기를 마음에 품고 사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그 죄인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겉옷까지, 목숨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 십자가 앞에 설 때, 비로소 우리도 조금씩 왼뺨을 돌려댈 힘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