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17~20)
어느 해 봄, 오래된 성당을 리모델링하는 현장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건축가가 낡은 벽을 허물려 할 때, 현장 감독이 손을 들어 그를 막았습니다. "이 벽은 허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장식 벽이 아니라 이 건물 전체를 지탱하는 내력벽입니다." 건축가는 처음에 의아했습니다. 이렇게 오래되고 낡은 벽이 무슨 힘이 있겠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도면을 다시 꺼내 살펴보고 나서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낡은 벽 위에 새 건물 전체가 서 있었습니다. 허무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더 아름다운 것을 완성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산상수훈을 듣던 사람들은 팔복의 말씀에 한편으로는 위로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했을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온유한 자가 복이 있으며,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분명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평생 배워온 율법적 세계관과는 충돌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가 복과 저주를 결정한다고 배워온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을 넘어서거나 심지어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 5:17) 처음 들으면 갑작스럽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을 처음부터 읽어온 사람이라면 이 선언이 전혀 낯설지 습니않다. 마태는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줄곧 구약의 예언들을 하나하나 짚어왔습니다. 동정녀 탄생은 이사야의 예언 성취였고(1:23), 베들레헴 탄생은 미가의 예언 성취였으며(2:6), 애굽으로의 피신은 호세아의 예언 성취였습니다(2:15). 예수님의 삶은 처음부터 구약이라는 악보 위에서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한 것은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 한 것과 같은 구도였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 일간 시험받으신 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사십 년간 실패한 것을 되새기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넘어졌지만, 예수님은 신명기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을 하나하나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포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천국의 법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폐지가 아니라 완성의 이야기입니다.
율법이 왜 주어졌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어린 시절, 엄격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식사 시간마다 규칙을 정해 두었습니다.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기 전에는 손을 대지 말 것, 밥상에서는 소리를 내지 말 것, 식사 후에는 반드시 감사 인사를 드릴 것, 어린 시절의 청년에게 그 규칙들은 때로 숨막히는 구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청년은 그 규칙들을 오히려 그리워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규칙 속에 담겨 있던 것은 할아버지의 사랑이었고, 가족을 하나로 묶으려는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규칙이 목적이 아니라, 규칙 너머에 사랑이 있었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해 주신 가이드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율법을 뒤틀었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었는데, 인간은 율법을 자기 의를 쌓는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율법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지를 증명하려 했고, 율법을 통해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칼로 사용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세목을 달달 외웠고, 안식일에 몇 걸음 이상 걸으면 안 된다는 것까지 계산했으며,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철저히 드렸습니다(마 23:23).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율법의 더 중요한 것, 곧 정의와 자비와 믿음은 버렸다고 말입니다. 율법의 외피는 완벽하게 지켰으나, 율법의 심장은 건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완전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장면을 떠올려보십시오. 요한은 당황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죄인들에게 주는 회개의 세례를 왜 죄 없으신 예수님이 받으려 하십니까? 요한이 거부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태복음 3:15) 죄 없으신 분이 죄인들의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완전한 의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단 한 명도 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율법 앞에서 인간이 발견하는 것은 자신의 의가 아니라 자신의 죄였습니다. 바울은 나중에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완전한 의를 이루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삶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율법이 선언하는 저주를 몸소 짊어지셨습니다. 율법은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셨지만, 우리의 자리에서 그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 순간, 율법의 모든 요구는 완전히 충족되었습니다. 더 이상 짐승의 피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해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제를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완전한 제물이 단번에 드려졌기 때문입니다(히 10:10).
성전이 폐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 되셨습니다. 제사 제도가 무의미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제물이 되셨습니다. 대제사장 제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형식의 껍질은 벗겨졌으나 그 안에 담긴 실체는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20절에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들은 청중들은 아연실색했을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당대 최고의 율법 준수자들이었습니다. 그들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러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망의 선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은혜의 초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무한히 뛰어난 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분은 의 그 자체이십니다.
마르틴 루터가 수도원에서 몸부림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고해성사를 했고, 몸을 채찍질했으며, 금식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확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을 볼 때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완전히 의로우신 하나님이 죄인인 나를 어떻게 대하실까 하는 공포였습니다. 그러다 로마서 1장 17절을 다시 읽는 순간, 그는 무너졌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하나님의 의는 내가 이루어야 하는 의가 아니라, 내게 주어지는 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주어지는 의였습니다. 루터는 그 순간을 "나는 완전히 새로 태어났고, 열린 문을 통해 낙원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율법이 왜 주어졌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만들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의롭지 못한지를 보여 주어서, 완전한 의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이끌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였습니다(갈 3:24).
그 오래된 성당에서 내력벽을 발견한 건축가는 결국 그 벽을 허물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벽을 더 견고하게 보강하고, 그 위에 더 아름다운 구조물을 세웠습니다. 완성된 건물은 옛 벽의 흔적을 품으면서도 이전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을 지웠지만, 그 위에 더 완전한 것을 세운 것이 아닙니다. 옛 언약 안에 이미 새 언약의 씨앗이 있었고, 예수님은 그 씨앗이 완전히 피어난 꽃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그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구약의 모든 절기는 그분 안에서 의미를 얻었으며, 구약의 모든 율법은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은 하나입니다. "나는 율법을 통해 나의 의를 증명하려 하는가, 아니면 율법을 통해 나의 죄를 발견하고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의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정작 율법의 완성자이신 분이 눈앞에 오셨을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알아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들의 의가 무너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와 병든 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율법 앞에서 자신의 의를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완전한 의를 가져오신 분을 두 손 들고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나의 죄인됨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우리의 완전한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 그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율법은 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길잡이였고, 그리스도는 그 길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완성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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