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21~26)
1961년 겨울, 예루살렘의 한 법정에서 세상이 숨을 죽였습니다. 피고석에 앉은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진두지휘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재판이 진행될수록 방청객들은 묘한 불안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괴물처럼 생기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얼굴, 관료적인 말투, 심지어 자신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진술까지 말입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 광경을 보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살인은 괴물만이 저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마음속에 이미 그 씨앗이 잠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 위에 앉아 군중을 향해 입을 여셨을 때, 그분이 겨냥하신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시므온은 스스로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율법 교사였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으며, 십일조를 한 푼도 빠짐없이 드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었습니다. 출애굽기가 명한 대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그는 완벽하게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은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어떠했을까요? 갈릴리 어부 출신의 저 무식한 야고보를 볼 때마다 속으로 '저런 무식한 놈'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세금을 거둬들이는 마태를 마주칠 때면 눈빛만으로도 그를 짓밟았습니다. 자신보다 인기 있는 동료 율법사를 시기할 때, 그 마음에는 이미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2) '라가'는 아람어로 '텅 빈 놈', 즉 오늘날로 하면 "골 빈 놈" 정도의 말입니다. 그 시대에도 그리 심한 욕은 아니었습니다. 길을 걷다 부딪힌 행인에게 한마디 툭 던질 수 있는, 지극히 사소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소한 욕 한 마디를 살인과 같은 선상에 놓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뿌리 없이 자라는 나무는 없습니다. 행동은 반드시 마음이라는 토양에서 자라납니다. 욕설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 한 마디 아래에는 이미 상대를 향한 경멸과 분노, 증오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손이 칼을 들기 전에 마음이 먼저 그를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과만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동기를 보십니다. 마음을 보십니다.
한 심리학 연구에서 피험자들에게 "평소 가장 싫어하는 사람의 얼굴을 10초 동안 떠올려 보라"고 했을 때, 대뇌에서 공격 충동과 관련된 편도체 반응이 실제 물리적 위협을 받을 때와 거의 동일하게 활성화되었습니다. 뇌는 이미 그를 '적'으로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손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마음은 이미 전쟁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점을 정확히 짚으십니다. 살인을 금하신 하나님의 본래 뜻은 단순히 손에 피를 묻히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라는 것, 형제를 향한 증오심 자체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어느 중년 성도가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오랜 사업 실패와 가정의 불화 속에서 지쳐버린 그는 조용히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저 솔직히 가끔 그냥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게 죄인가요?" 목사님은 잠시 침묵했다가 물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죽고 싶다는 생각,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그 마음 자체가 이미 자기 자신을 향한 살인입니다.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죄는 마음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시간도 죄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이 물음에 대해 명확히 대답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철저한 죄인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성전으로 가는 길을 상상해 보십시오. 양 한 마리를 끌고, 제사장 앞에서 드릴 예물을 준비하여 제단 앞에 선 순간, 문득 어떤 얼굴이 떠오릅니다. 지난 주에 다툰 형제, 아직 화해하지 못한 이웃, 그 마음에 응어리진 것이 아직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물을 내려놓고 먼저 그 사람에게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가르침의 무게를 느끼십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보다 형제와의 화목이 먼저라고 하십니다. 왜입니까? 형제와의 관계가 곧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죄인인 채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하나님께 참된 예물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까? 형제와 완전히 화목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습니까?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제물 자체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이사야는 선포했습니다. "내가 수소의 피나 어린 양의 피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1). 하나님이 제사 제도를 주신 것은 그 제물을 받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가르치기 위한 임시 교과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드리는 모든 예물은 결국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습니다. 깨끗하지 않은 손으로 드리는 예물은 없는 것만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자신의 뺨을 때리는 자들 앞에서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던 분, 채찍에 맞으면서도 증오가 아닌 사랑으로 응답하셨던 분,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며 자기 자신을 흠 없는 온전한 제물로 드리셨던 분, 그분만이 형제를 향한 미움이 없으셨습니다. 그분만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물로 설 수 있으셨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오랫동안 탑 안의 골방에서 로마서를 붙들고 씨름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금식하고, 고행하며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선명해지는 것은 자신의 죄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루터는 그 자리에서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내가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밖에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선언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자기 자신이 쌓아 올린 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밖에서 주어지는 의입니다.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의입니다.
성도의 삶이란 이제 죄를 짓지 않는 삶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오늘도 마음속에서 누군가를 향해 '라가'라고 중얼거립니다. 누군가를 미워합니다. 시기합니다. 속으로 그를 지워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주어진 복음은 이것입니다. 날마다 미워하는 마음과 살인하는 죄를 짓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덮으신다는 것, 그 죄를 죄로 보시지 않겠다는 것, 이것이 칭의의 은혜입니다.
조선 말기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한 문서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포졸들에게 끌려가던 한 신자가 자신을 고발한 이웃을 마주쳤습니다. 그 이웃은 눈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신자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괜찮소. 나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소." 그 평안은 자기 수양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자신의 죄가 십자가로 덮인 자만이 타인의 죄도 덮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 안에 있는 자는 자신의 죄를 늘 자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그 은혜에 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폭로한 내 죄의 깊이만큼, 십자가의 은혜가 더 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살인에 관한 계명을 새롭게 해석하신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 계명이 뜻했던 바를 되살리신 것입니다. 죄는 손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죄를 들여다보면, 이 세상에 온전한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복음이 시작됩니다. 율법이 "너는 죄인이다"라고 선고할 때, 복음은 "그러나 그리스도가 네 대신 섰다"고 선언합니다. 율법이 "너는 예물을 드릴 자격이 없다"고 고발할 때, 복음은 "예수님이 너를 위한 예물이 되셨다"고 응답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 그것은 더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 의가 아닙니다. 율법을 온전히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의입니다. 오늘 우리가 고백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 저는 마음으로 이미 살인한 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가 저를 덮으십니다. 그 은혜로 오늘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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