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3~16)
1940년대 폴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나치 점령 하에 유대인들이 하나씩 사라져가던 그 시절, 한 가족이 지하 창고에 숨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웃집 노인이 매일 밤 몰래 음식을 날라다 주었습니다. 위험을 무릅쓴 그 행동에 감격한 유대인 가족이 어느 날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왜 이렇게 목숨을 걸고 저희를 도우시나요?" 노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이오. 그것뿐이오." 그는 자신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뿐이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 말씀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주 인용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자동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낍니다. '소금이 되어야 한다, 빛이 되어야 한다, 사회를 정화해야 한다, 이웃을 섬겨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본문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면 놀라운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은 소금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부패 방지를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 맛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그리고 빛에 대해서도 빛이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빛은 캄캄한 곳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예수님의 강조점은 역할이 아니라 존재에 있습니다.
소금이란 물질은 흥미롭습니다. 소금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소금통 안에 가만히 있는 소금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반드시 누군가의 손이 소금통을 열고 집어 들어 뿌려야만 소금은 비로소 소금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소금이 음식 위에 뿌려지는 순간, 소금은 더 이상 소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음식 속에 녹아들어, 음식 자체가 달라집니다.
구약성경에서 소금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향을 만드는 출애굽기 30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의 향을 만드는 법을 모세에게 가르치시면서 특별히 명령하십니다.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라." 아무리 정성껏 만든 향이라도 소금이 빠지면 거룩한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레위기에서는 소제물에도 반드시 소금을 뿌리라고 명하셨습니다. 꿀은 넣지 말고 누룩도 넣지 말되, 소금만은 절대 빼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민수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으신 그 언약을 가리켜 소금 언약이라 부르셨습니다. 변하지 않고, 영원히 유효한 언약입니다.
소금은 그러므로 구약 전체에서 정결, 거룩, 그리고 영원한 언약을 상징하는 물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을 때, 그 말씀 뒤에 얼마나 깊은 의미가 놓여 있는지가 보입니다. 제자들에게 '이제 너희는 정결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이 드러나는 존재'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다시 소금을 언급하십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화목이란 인간의 능력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였고, 서로를 이겨야 살아남는 세상 속에 내던져진 존재였습니다. 그 안에 화목이 생긴다는 것은, 반드시 그 속에 소금 같은 존재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 소금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히말라야 산맥의 외딴 마을을 생각해보십시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깊은 산속 마을에 밤이 내리면, 마을 전체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깁니다. 그런데 그 어둠 속에서 한 집의 창문에 등불이 켜집니다. 그 등불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빛을 내뿜는다는 선언도 없고, 어둠을 몰아내겠다는 결의도 없습니다.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데 산 아래 골짜기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는 그 불빛을 봅ㄴ다. 수십 리 밖에서도 그 빛은 보입니다. 빛은 숨겨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산 위의 성읍은 요새입니다. 철저히 은폐되도록 설계된 군사적 거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읍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결국 드러납니다. 빛이란 그런 것입니다. 가리려 해도 가려지지 않고,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1장 5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리켜 빛이 어둠 속에 왔다고 선언합니다. 마태복음 4장 16절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이 모든 증언이 하나를 향합니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스스로 빛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그 빛의 반사체로서 세상 속에 드러난다는 선언입니다. 마치 달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빛을 받아 어두운 밤하늘에서 빛나듯이 말입니다.
20세기 영국의 순교자 짐 엘리엇은 에콰도르 아우카 족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죽음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을 죽인 그 부족에게 다시 들어갔습니다. 복수하러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아무 연설도 하지 않았고, 캠페인을 벌이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부족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무엇인가가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소금과 빛의 본질입니다. 흔히 우리는 "소금이 되자, 빛이 되자"고 외칩니다. 선의에서 나온 외침입니다. 그러나 그 외침은 자칫 우리를 성취를 향한 경쟁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나는 얼마나 사회에 기여했는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가,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는가?' 이 질문들 속에서 우리는 점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고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소금이 자신의 짠맛을 스스로 내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이미 소금이 아닙니다. 빛이 스스로 빛나겠다고 결심한다면, 그것은 이미 빛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미 소금이다. 너희가 이미 빛이다.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과 하나 된 자라면,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음식에 뿌려지면 굳이 '나 지금 짠맛 내고 있어요'라고 선언할 필요가 없듯이, 빛이 켜지면 굳이 '나 지금 빛나고 있어요'라고 외칠 필요가 없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경고가 있습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사용되던 소금은 오늘날의 정제염과 달랐습니다. 사해 주변에서 채취한 천연 소금덩어리에는 다양한 불순물이 섞여 있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거나 습기에 노출되면 실제 소금 성분이 빠져나가고 불순물만 남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소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맛도 없는 덩어리만 남는 것입니다. 그것은 밭에도 거름으로도 쓸 수 없어 길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경고하셨습니다.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가 사라진 상태, 교회 안에서는 천사의 모습을 지니지만,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예수님과 이별하고 사는 삶, 그런 삶은 이미 소금이 맛을 잃은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종교는 예수 없는 기독교다." 형식은 있고, 언어는 있고, 문화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연결이 없는 신앙, 그것은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예수님은 결론부에서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서 착한 행실이란 무엇입니까? 윤리적으로 모범을 보이는 삶입니까, 도덕적으로 흠 없이 사는 것입니까? 그런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집니까?
인간 역사에서 가장 도덕적으로 살았던 사람들, 예컨대 소크라테스, 공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이들의 삶을 보며 사람들은 감동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 감동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선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착한 행실은 단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행실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수치를 감수하고,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닌 하늘이 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삶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드러날 때, 그들은 그 사람 속에서 단순한 윤리적 인간이 아닌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발견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듭니다.
폴란드의 그 노인은 유대인 가족을 구하겠다는 대단한 계획을 세운 적이 없었습니다. 사회를 개혁하겠다는 선언도 없었습니다. 그저 어느 날 밤, 지하 창고에 숨은 이웃의 배고픔 앞에서,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빵을 싸들고 어둠 속으로 걸어갔습니다. 그 발걸음이 빛이었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무엇인지 알았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되어 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기억이, 그 깨어있음이, 오늘 우리가 세상 속에서 걸어가야 할 길을 알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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